암호화폐는 거대한 기회를 낳았지만, 그만큼 거대한 리스크도 함께 키워 온 새로운 금융 프런티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해커들은 거래소와 디파이(DeFi) 플랫폼에서 수십억 달러를 털어 갔고, 개인의 단순 실수로 자산이 영영 사라진 사례가 이어졌다. 소프트웨어 결함 하나가 시장 전반으로 도미노처럼 번진 적도 적지 않다. 정부 예금보호제도가 적용되는 은행 예금과 달리, 암호화 자산에는 이런 손실을 자동으로 막아주는 ‘안전망’이 거의 없다. 코인이 도난당하거나 스마트컨트랙트가 해킹을 당하면, 피해자는 사실상 손해를 떠안는 수밖에 없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암호화폐 보험’이다. 암호화폐 보험은 디지털 자산 보유자가 도난, 해킹, 스마트컨트랙트 버그, 그 밖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입는 손실을 보전해 주기 위해 설계된 신종 보험 상품군을 말한다. 전통 보험의 기본 원리인 “위험을 모아(풀링) 재난 발생 시 재무적 충격을 완화한다”는 개념을, 블록체인·토큰 경제라는 새로운 영역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다.
업계가 성숙해지면서 암호화폐 보험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다. 10년 전만 해도 비트코인이나 기타 토큰에 대한 보험을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2014년 마운트곡스(Mt. Gox) 사태 같은 대형 해킹, 높은 변동성, 기술의 생소함 때문에 전통 보험사들은 이 시장에 발을 들이길 꺼렸다. 하지만 디지털 자산에 묶인 가치가 수조 달러 규모로 불어나고 기관투자가가 대거 진입하면서, 보호 장치에 대한 수요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현재 암호화폐 보험 시장은 아직 규모는 작지만,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인 틈새 분야다. 연간 보험료 기준 수억 달러 수준에 불과하지만 성장 속도만 놓고 보면 기존 사이버 보험 시장을 앞지르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전체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한 추산에 따르면 전통 금융 자산의 약 7%가 보험으로 커버되는 반면, 암호화 자산의 보험 커버 비율은 1% 남짓에 그친다. 이 ‘보호 공백’은 업계에 부담이자 기회다. 블록체인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보험 대형사까지 다양한 플레이어가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한 솔루션 개발에 뛰어든 배경이다.
이 글에서는 암호화폐 보험의 개념과 필요성, 그리고 진화를 금융 독자 관점에서 정리한다. 초기 거래소 수탁 보험에서 출발해 오늘날 탈중앙화 리스크 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짚고, 개인 월렛·NFT·디파이 포지션 등 암호화 생태계 각 부문이 직면한 리스크와 이를 어떻게 커버하려 하는지 분석한다. 런던 로이즈(Lloyd’s) 신디케이트, 코인커버(Coincover), 각국 규제 허가 보험사 등 중앙화 보험사 모델과, 넥서스 뮤추얼(Nexus Mutual), 리스크 하버(Risk Harbor) 등 온체인 탈중앙화 모델을 비교해 보며, 보장 범위·청구 프로세스·신뢰도 측면 차이도 살펴본다. 아울러 미국·EU·아시아 주요 규제 환경이 암호화 리스크 공시 및 보험 요구 수준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도 점검한다. 마지막으로, 자본 효율성 부족·오라클 리스크 같은 구조적 난제를 짚고, 파라메트릭(지표 연동) 보험, AI 기반 리스크 모델링, 레이어2 연동, 기관 참여 확대 등 미래 트렌드가 이 신생 섹터를 어떻게 재편할 수 있을지 전망한다.
암호화폐 보험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암호화폐 보험은 한마디로 “암호화폐라는 특수 자산과 그에 수반된 고유 리스크에 맞춘 맞춤형 보험”이다. 좀 더 형식적으로 표현하면, 도난·해킹·키 분실 등으로 발생하는 손실로부터 암호화폐 보유자를 보호하기 위한 특수 보험이다.
실제 상품 구조는 다양하다. 중앙화 거래소나 수탁 기관이 보관하던 비트코인·이더리움이 해킹으로 탈취될 경우를 대비한 정책이 있고, 디파이 프로토콜의 스마트컨트랙트 실패·버그를 커버하는 상품도 있다. 대체불가능토큰(NFT)을 보호하거나, 채굴 장비 등 암호화 관련 물적 설비를 대상으로 하는 보험도 등장했다. 공통점은 ‘치명적 손실’의 위험 – 거래소 해킹, 내부자에 의한 자금 유용, 코드 상의 치명적 버그 등 – 을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보험 풀로 이전한다는 점이다. 자동차 사고 시 보험사가 보상하듯, 약관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디지털 자산을 잃었을 때 일정 부분을 보험금으로 돌려 받게 하는 구조다.
이 보험이 중요한 이유는, 암호화폐 세계에서는 손실이 거의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상 거래는 최종성(finality)을 전제로 정산된다. 은행 송금처럼 사후 취소나 조정이 불가능하고, 도난당한 코인을 제3의 권위기관이 임의로 되돌려 줄 수도 없다. 누군가가 당신의 월렛을 털어 가거나, 당신이 이용하는 플랫폼이 해킹을 당하면, 통상적으로 취할 수 있는 구제수단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은 특히 기관투자가 및 보수적 투자자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해 왔다. 보험은 이 공백을 메우는 재무적 ‘최후의 방어선’이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자산 가치를 일정 부분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한 법률 분석 보고서는 보험을 “보유 자산의 가치가 하룻밤 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제공하는, 암호화 생태계의 ‘마지막 연결고리’”라고 표현한다. 완벽한 보안이 실현되지 않는 이상(현재까지 어떤 보관 방식도 완전 무결함을 입증하지 못했다), 해킹이나 실수로 인한 ‘전액 손실’을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보험뿐이다.
개인 투자자에게 보험은 “한 통의 피싱 메일이나 한 번의 악성코드 감염이 전 재산을 날리는 사태”에 대한 최소한의 심리적 방패막이다. 그동안 여러 사건·사고를 통해 중앙화 거래소와 개인 월렛 모두 언제든 뚫릴 수 있다는 점이 반복해서 확인됐다. 2022년 초, 한 NFT 수집가는 피싱 링크에 속아 250만 달러가 넘는 가치의 ‘보어드 에이프(Bored Ape)’ NFT 컬렉션을 한 번에 탈취당했다. 2014년 마운트곡스 파산, 2022년 FTX 붕괴 등 거래소 붕괴 때마다 고객들은 겨우 푼돈만 돌려받거나, 아예 손실을 확정 지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효한 보험증권은 말 그대로 ‘생명줄’이 될 수 있다.
아직까지 개인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암호화폐 보험 상품은 제한적이지만, 코인커버(Coincover) 같은 사업자는 개인 월렛·NFT를 대상으로 최대 10만 달러 한도의 소비자 지향형 보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손실 발생 시 누군가 일정 부분을 보상해 준다는 사실은, 초보 투자자가 암호화 시장에 진입할 때 느끼는 공포를 상당 부분 덜어 준다.
기관 투자자에게 암호화폐 보험은 사실상 필수 요건에 가깝다. 은행·헤지펀드·패밀리오피스·상장사 등은 고객 자산을 운용하는 만큼 엄격한 위험관리 규정과 신탁 의무를 따른다. 이들은 통상 수천만~수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제3자를 위해 관리하기 때문에, 이 자산이 적절히 보호되고 있다는 외부 검증과 보험 커버를 요구한다. 한 업계 보고서가 지적하듯 “대형 기관투자가는 충분한 보험 커버리지를 갖추지 못한 업체와는 거래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전통 금융에도 적용되지만, 해킹 전례와 규제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암호화폐 영역에서 더 민감하게 작동한다. 미국의 코인베이스(Coinbase)·제미니(Gemini)·크립토닷컴(Crypto.com) 같은 대형 거래소·수탁사는 콜드월렛(오프라인 보관분)에 대해 수억 달러 규모의 보험 한도를 확보했다는 점을 앞다퉈 내세운다. 이런 정책은 다수의 보험사가 컨소시엄을 이뤄 인수하며, 물리적 침입·사이버 공격 등 특정 사고를 약관으로 정의해 커버한다.
제미니는 2020년 아예 자체 캡티브 보험사를 설립해 당시 업계 최대였던 2억 달러 규모 콜드스토리지 한도를 확보했다. 당시 리스크 총괄 유수프 후세인(Yusuf Hussain)은 “보험은 대중 채택을 가로막는 마지막 허들 중 하나다… 대중 도입을 위해서는 규제와 컴플라이언스를 갖춘 거래 환경과, 전통 금융과 동일한 수준의 보호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보험은 암호화폐의 ‘정통 금융 편입’을 위한 핵심 인프라라는 의미다. 보험이 있어야 기관투자가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충분한 보험 패키지가 자산을 방어해 줄 것”이라는 안도감을 갖고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암호화폐 보험이 리스크 자체를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리스크의 부담 주체를 바꾸고, 피해 규모를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주택 보험이 화재를 막을 수는 없지만, 화재 이후 재건 비용을 보전해 주듯, 암호화폐 보험은 해킹을 막지는 못해도 피해자에게 재정적 완충 장치를 제공한다. 이는 개인 차원을 넘어 시장 전체에도 긍정적이다. 회복 불가능한 손실에 대한 공포를 줄임으로써, 참여자 저변과 시장 안정성을 동시에 높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분석가들은 보호장치 부재가 잠재 투자자들을 시장 밖에 묶어 두는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해 왔다. 보험이 보편화되면 “사람들이 자산을 보유·사용·투자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해 준다”는 평가도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대형 해킹 사고 이후 패닉과 신뢰 붕괴가 완화되면서, 가격 변동성 축소에도 일부 기여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정리하면, 암호화폐 보험은 후방 안전장치가 거의 없는 시장에 신뢰와 리스크 관리 계층을 추가하는 장치다. 주식·채권·부동산처럼 전통 금융에서 사실상 모든 자산·활동에 보험이 얹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암호화폐에도 비슷한 기대 수준을 만들어 간다. 개인 투자자의 월렛 보호에서, 인슈어테크 스타트업의 규제 준수, 연기금의 수탁 자산 보험 요구까지, 보험의 존재는 이 산업이 성숙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다만 여기까지 오기까지는 수년간의 시행착오와 점진적 진화가 필요했다.
콜드스토리지에서 탈중앙 풀까지: 암호화폐 보험의 짧은 역사
비트코인 초창기(2009~2015년)에는 암호화폐를 대상으로 하는 보험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익명성이 강한 이용자들이 보유한 디지털 토큰의 해킹 손실을 전통 보험사가 인수한다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2014년 85만 BTC를 날린 마운트곡스 해킹 사태처럼 위험성이 극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당시 보험사들의 선택은 ‘시장 철수’였다. 들어오기보다는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쪽을 택한 것이다. 언더라이팅에 나서는 보험사가 거의 없었다. 국면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후반, 가상자산이 하나의 의미 있는 자산군으로 성장하면서부터다. 결국 *“기회와 수요가 무시하기엔 너무 커졌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소수의 선도적 언더라이터들이 조심스럽게 이 시장에 발을 들였다.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분야는 수탁 자산을 대상으로 한 보장, 이른바 커스터디 보험이었다. 규제상 ‘적격 수탁기관’이나 거래소가 보관하는 디지털 자산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이다. 보험사들이 상대적으로 안심했던 것은 이른바 ‘콜드월렛’ 자산, 즉 인터넷과 분리된 상태로 금고에 보관되는 형태였다. 은행의 안전금고에 넣어둔 귀중품과 유사한 개념이다. 보험사는 프라이빗키를 고액의 무기명 채권이나 다이아몬드에 준하는 자산으로 간주함으로써, 기존에 익숙한 보험 라인(주로 금괴·귀금속·예술품 등을 다루는 ‘스피시(specie)’ 시장) 안에서 위험을 분류할 수 있었다.
이 분야의 이정표로 꼽히는 사례가 2018년 8월이다. 미국의 규제 적격 수탁기관인 Kingdom Trust가 런던 로이즈를 통해 고객의 암호화폐 자산을 도난·파손으로부터 보호하는 보험을 체결한 것이다. Kingdom Trust는 사실 2010년부터 보험 도입을 추진해왔지만, 가상자산의 위상이 커진 뒤에야 로이즈 신디케이트들이 솔루션 제공에 나섰다. Kingdom Trust CEO는 *“초기부터 기관투자가를 끌어들이는 핵심 요인이 보험이라고 봤다”*고 밝히며, 잠재 고객에게 ‘심리적 안전장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보험사와 보험료 등 구체 조건은 비공개였지만, 이 계약은 *“한때는 회피하던 보험업계가 가상자산 기업에 보호장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됐다.
2018년 이후로는 더 많은 거래소와 수탁기관이 뒤를 이었다. 보험사들은 Aon, Marsh 같은 브로커를 통해 주요 가상자산 기업에 범죄보험이나 스피시 보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다만 큰 단서가 있었다. 보장 범위가 대부분 콜드월렛 자산에 국한됐다는 점이다. 인터넷에 연결된 ‘핫월렛’에 대해서는 해킹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대개 보장에서 제외하거나 극히 제한적으로만 인수했다. 따라서 거래소 입장에선 오프라인으로 보관하는 대다수 자산에는 보험을 붙일 수 있었지만, 출금 편의를 위해 ‘핫’ 상태로 유지하는 자산은 여전히 취약 지대로 남았다. 그럼에도 2019년이 되자 업계의 일종의 기준치가 형성된다. 예를 들어, 코인베이스는 핫월렛 잔액에 대해 2억5,500만 달러 규모의 보험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고, BitGo는 콜드 스토리지 자산에 대해 로이즈가 뒷받침하는 1억 달러 한도의 보험을 확보했다. 보험사들은 강력한 사이버 보안, 멀티시그 체계, 임직원 백그라운드 체크 등 엄격한 요건을 부과하고, 높은 불확실성을 감안한 두터운 보험료를 받으면서 점차 위험을 학습해 나갔다.
대형 보장 한도를 확보하기 위한 한 가지 전략은 ‘캡티브 보험사’ 활용이었다. 2020년 초, 윙클보스 형제가 이끄는 거래소 제미니(Gemini)는 버뮤다에 ‘나카모토 Ltd.’라는 캡티브 보험사를 설립했다는 소식으로 화제를 모았다. 제미니의 커스터디 비즈니스를 위해 자체 보험사를 세운 것이다. 이 라이선스 보유 캡티브를 통해 제미니는 고객 자산에 대해 총 2억 달러 규모의 보장 한도를 구성했다.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대 수준의 암호화폐 보험 한도로 평가됐다. 구조를 보면, 캡티브가 일부 위험을 자체 부담하는 한편, 나머지는 전통 보험사 컨소시엄에 재보험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브로커인 Marsh가 상업 시장에서 초과보험(엑세스 레이어)을 제공할 언더라이터들을 모집해 구조를 완성했다. 제미니 사례는 초기 암호화폐 보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보험 조달은 분명 가능하지만, 창의적인 구조 설계와 상당한 노력·비용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제미니 리스크 총괄은 보험이 대중화에 필수적이라며, *“고객들은 전통 금융에서 [이런 보호장치]에 익숙해져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여전히 상당수 보험사는 핫월렛에 대한 보장을 거부했고, 제미니의 계약 역시 예외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보장은 여전히 공격 노출도가 훨씬 낮은 콜드 스토리지 자산에 집중됐다.
비슷한 시기인 2019~2020년에는 가상자산 커뮤니티 내부에서 전통 보험을 대체하려는 탈중앙형 솔루션도 등장했다. 그 시작이자 대표 사례가 2019년 5월 출범한 넥서스 뮤추얼(Nexus Mutual)이다. 블록체인 기반 상호부조 풀 형태로 설계된 넥서스 뮤추얼은 전통적 의미의 보험사가 아니라, 영국 법에 따른 재량형 상호조합 구조를 채택했다. 사실상 구성원이 공동으로 위험을 분담하는 자조 기금이다. 이들은 *스마트컨트랙트 커버(smart contract cover)*라는 상품을 내놓았는데, 특정 디파이 대출 프로토콜 등 지정된 스마트컨트랙트가 해킹이나 취약점 공격을 당했을 때 보상을 제공하는 구조다. 리스크를 잘 이해하는 크립토 이용자들이 자본(넥서스의 경우 자체 토큰 NXM)을 풀에 예치해 서로의 해킹 리스크를 공동부담하는 발상이다. 이후 수년간 넥서스 뮤추얼은 이 모델의 실행 가능성을 증명했다. 2019년 이후 디지털 자산 관련 위험 약 50억 달러를 인수했고, 각종 디파이 손실에 대해 1,800만 달러 규모의 클레임을 실제로 지급했다. 시장 전체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지만, 복잡한 프로토콜 익스플로잇 같은 사건에도 탈중앙형 보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청구를 처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넥서스 뮤추얼의 성과는 2020~2021년 디파이 붐 기간에 다수의 크립토 네이티브 보험 프로젝트가 우후죽순 등장하는 촉매 역할도 했다(이들에 대한 비교는 후반부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한편, 전통 보험사들도 커스터디 자산을 넘어 보장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런던 로이즈 언더라이터들이 이전까지는 사실상 ‘보험 불가’ 영역으로 여겨지던 핫월렛을 겨냥한 새로운 상품을 선보였다. 2020년 2월 로이즈는 프레스 릴리스를 통해 Atrium 신디케이트와 Coincover가 공동 개발한 “세계 최초 유형”의 암호화폐 지갑 보험 솔루션을 발표했다. 이 상품의 특징은 가상자산 시세 변동에 따라 보장 한도가 자동 조정되는 다이내믹 구조로, 시장 가격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보장 가액을 유지하도록 설계됐다는 점이다. 개인 투자자부터 소규모 기업까지를 겨냥해, 온라인 지갑을 대상으로 최소 1,000파운드 수준의 도난 담보를 제공했다. 영국 기반의 암호화폐 보안 스타트업인 Coincover는 키 백업과 거래 모니터링 서비스를 제공해 지갑 탈취 리스크를 낮추는 기술 파트너 역할을 맡았다. 로이즈와 Coincover의 이 이니셔티브는 가상자산 보급의 최대 걸림돌 중 하나를 제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Coincover CEO는 로이즈 발표문에서 *“충분한 보호장치가 없어 가상자산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진입을 망설이던 새로운 고객층이 많았다… 이 혁신적 상품을 통해 이런 장벽을 허물고 크립토의 저변을 넓힐 수 있다”*고 밝혔다. 요약하면, 전통 보험시장은 깊은 냉동 보관 자산만을 대상으로 한 초기 단계에서 점차 실제 사용 단계의 익스포저까지 일부 수용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진화하고 있었다.
2010년대 후반~2020년대 초에는 전통 보험업계 인력과 자본이 스타트업을 경유해 크립토 분야로 유입되는 흐름도 두드러졌다. 2017년 설립(초기 이름은 BlockRe)된 Evertas 같은 회사들은 런던 로이즈 마켓 안에서 활동하는 ‘크립토 특화 보험사’를 자처했다. 2022년에는 블록체인 보안업체 Quantstamp의 자회사로 체인프루프(Chainproof)가 출범하며 *“세계 최초의 규제받는 스마트컨트랙트 보험사”*를 표방했다. 체인프루프는 버뮤다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라이선스를 취득했고, 일본 손보 대형사 손보(Sompo)와 재보험 공룡 뮌헨리(Munich Re)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의 초점은 디파이 프로토콜에 예치된 자산, 즉 전통 보험사가 아직 커버하지 않는 온체인 리스크를 보장하는 데 맞춰져 있다. 체인프루프의 등장은 시장에 존재하던 명확한 공백을 드러낸 사례다. 그전까지는 기관투자가가 보험이 붙은 커스터디 지갑에서 컴파운드(Compound)나 유니스왑(Uniswap) 같은 디파이 플랫폼으로 자산을 이동하는 순간, 해당 자산은 보험 보호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체인프루프는 이 비보장 구간을 메우기 위해 규제준수·KYC 기반의 논커스터디 자산 보험 상품을 내놓았고, 이를 통해 기관들이 리스크 관리·규제 요건을 훼손하지 않고도 디파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뮌헨리 등 대형 재보험사의 지원은 또 다른 신호였다. 전통 보험사가 크립토 리스크 자체를 직접 다루기에는 부담스러워도, Quantstamp처럼 크립토 네이티브 보안 전문성과 손잡는다면 재보험 형태로 위험을 인수할 의향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20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암호화폐 보험 지형은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다층 구조로 자리 잡는다. 한쪽 끝에서는 대형 보험사와 브로커들이 거래소·수탁기관을 위해 점점 더 큰 단일 한도의 보험을 설계하고 있다. 예컨대 2023년에는 로이즈를 통해 Arch가 Evertas에 최대 4억2,000만 달러 규모의 단일 커스터디 보험 상품을 인수할 권한을 부여했는데, 업계 최대 한도로 전해진다. 다른 한쪽 끝에서는 탈중앙 보험 풀들이 스테이블코인 디페깅이나 NFT 도난 등 새로운 영역으로 보장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가격 지수나 온체인 이벤트를 기준으로 자동 지급이 이뤄지는 파라메트릭 구조와 커뮤니티 거버넌스를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이 둘 사이에는 Coincover의 보험 연계 지갑 기술, 캡티브 및 리스크 공유 컨소시엄 등 전통과 크립토를 절충한 하이브리드 모델도 포진해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가상자산 가운데 실제로 보험에 가입돼 있는 비율은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10여 년 전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던 상태에서 오늘날과 같은 다층적 시장으로 진화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2025년 Hunton Andrews Kurth 로펌의 한 파트너는 “크립토 익스포저를 겨냥한 보험 상품 지형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고 평하며, 신종 리스크를 둘러싸고 보험사 간 경쟁과 혁신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어떤 리스크가 존재하는지, 특히 지갑, NFT, 디파이 포지션이 어떤 식으로 취약해질 수 있는지 살펴보며, 이후 소개할 구체적인 보험 커버리지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리스크 이해하기: 지갑, NFT, 디파이
암호화폐 자산은 태생적으로 리스크가 높은 환경에 놓여 있다. 크립토 보험이 무엇을 커버하는지 이해하려면, 보유자가 실제로 어떤 유형의 위협과 손실에 직면하는지를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자산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보관·활용하느냐에 따라 큰 틀에서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개인 지갑에 보관하는 경우, 고유한 디지털 소유권을 가진 NFT 형태인 경우, 그리고 디파이 프로토콜에 예치하거나 락업해 두는 경우다. 물론 이들 카테고리 간에는 겹치는 부분도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온라인 시스템이…핫월릿·콜드월릿, NFT, 디파이(DeFi) 등 암호화 자산 보관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노출되는 리스크 역시 서로 다르다. 주요 위험 지형을 항목별로 짚어본다.
1. 개인 암호화폐 지갑(핫월릿·콜드월릿): 보안과 보관 리스크의 양면
자산을 거래소가 아닌 개인 지갑에 ‘셀프 커스터디(직접 보관)’할 경우, 보안은 전적으로 본인의 프라이빗 키 관리 역량에 달려 있다.
**핫월릿(hot wallet)**은 모바일 앱·브라우저 지갑처럼 인터넷에 상시 연결된 소프트웨어 지갑을 의미한다. 사용 편의성이 높아 일상 결제·거래에 자주 쓰이지만, 외부 공격에 가장 취약한 형태다. 해커는 악성코드로 프라이빗 키를 훔치거나, 피싱 사이트·가짜 앱을 통해 시드 구문(seed phrase)을 유출시키고, 지갑 소프트웨어의 취약점을 노리기도 한다. 지원센터를 사칭해 복구 문구를 요구하는 등 사회공학 공격도 빈번하다.
핫월릿 리스크는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래소·핀테크 업체도 운영 유동성을 위해 온체인 핫월릿을 유지하는데, 이 역시 사이버 범죄자들의 대표적인 타깃이다. 2022년 ‘Ronin Network 해킹’ 사건에서는 검증인(validator) 키가 탈취되며 약 6억1500만 달러 규모 자금이 유출됐다. 내부자 리스크도 무시할 수 없다. 일부 거래소에서는 직원이 공모해 자금을 빼돌린 사례도 보고됐고, 이 때문에 상당수 커스터디 보험 상품은 ‘내부자 공모(insider collusion)’를 명시적 담보 위험으로 포함한다.
반면 **콜드월릿(cold wallet)**은 하드웨어 지갑, 종이 지갑 등 프라이빗 키를 오프라인에 두는 방식을 말한다. 온라인 해킹으로부터는 훨씬 안전하지만, 물리적 도난·분실·훼손이라는 다른 유형의 리스크가 생긴다. 금고나 안전금고에 보관한 하드웨어 지갑이 도난당하거나, 백업 키 없이 디바이스를 분실하면 자산은 영구히 회수 불능이 된다. 종이 백업은 화재·홍수 등 재난에 취약하다. 일부 보험은 이러한 물리적 손실을 담보하지만, 이용자의 단순 과실까지 폭넓게 보상하는 경우는 드물다. 잘못된 주소로 전송한 송금 사고처럼 “자산 보유자의 실수로 인한 손실”은 대부분 약관에서 명시적으로 제외된다.
이 같은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Coincover와 같은 제3자가 암호화된 키 백업을 보관하고, 사용자가 접근 권한을 잃더라도 자산 복구 또는 일정 한도 내 금전 보상을 보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상품도 등장했다. 일종의 ‘보험이 결합된 키 복구 서비스’로, 전통적인 분실 키 문제를 기술과 보험의 결합으로 풀려는 시도다.
결국 지갑 리스크를 정리하면, 핫월릿은 해킹·악성코드 등 외부 도난 리스크, 콜드월릿은 분실·도난·훼손에 따른 보관 리스크가 핵심이다. 대형 거래소 상당수는 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보유 자산의 약 98%를 콜드월릿에, 약 2%만을 핫월릿에 두고, 이 중 일부에 한해 보험을 가입하는 구조를 취한다.
일반 개인에게 종합적인 지갑 보험은 아직 흔치 않지만, Coincover 같은 업체들이 거래 모니터링 솔루션 사용을 전제로 핫월릿 도난을 일정 한도까지 배상하는 개인용 상품을 내놓고 있다. 다만 셀프 커스터디 자산에 대한 보험이 이용자의 비밀번호 망각, 단순 피싱 피해 등 ‘본인 과실’을 어디까지 커버하는지는 상품마다 크게 다르며, 대부분은 엄격히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어떤 보험도 시장 가격 변동에 따른 손실은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격이 50% 폭락하더라도 이는 보험 대상이 아니다. 암호화폐 보험은 어디까지나 운영·보안 리스크를 다루지, 투자 손실을 메우는 수단이 아니다.
2. 대체불가토큰(NFT): 도난·가치 산정·진위성이라는 삼중 난제
NFT는 디지털 수집품, 예술 작품, 게임 아이템 등 고가 디지털 자산을 블록체인 상에 ‘유일한 토큰’으로 기록한 것이다. 일부는 수백만 달러에 거래되며, 엄청난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기본적인 리스크는 암호화폐 토큰과 다르지 않다. NFT 역시 특정 지갑에 보관되므로, 지갑이 해킹되면 NFT도 그대로 탈취된다. 실제로 한 컬렉터가 피싱 공격을 당해 Bored Ape Yacht Club NFT 수십 개, 약 250만 달러 상당을 한 번에 도난당한 사례가 있다. 2022년 2월에는 최대 NFT 마켓플레이스인 OpenSea에서 마이그레이션 기능을 악용한 공격으로 250개, 약 170만 달러 규모 NFT가 유출되기도 했다. ‘대체불가(non‑fungible)’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고유하다는 뜻일 뿐, 훔칠 수 없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온체인 공개 특성상, 고가 NFT 보유자는 피싱·사회공학 공격의 표적이 되기 쉽다.
NFT 특유의 난점은 가치 평가와 진위성이다. 보험은 손실액을 산정해야 하는데, NFT 가격은 미술품처럼 주관적·변동성이 극단적으로 크다. 한 달 전 30만 달러에 거래된 NFT가 1년 뒤에는 5만 달러에도 팔리지 않을 수 있다. 손해액 산정 시 ▲매입가 기준으로 볼지, ▲사고 시점 시가로 할지, ▲사전 합의 가치(agreed value)로 정할지부터 논쟁이 생긴다.
도난 이후 자산의 ‘가치’와 ‘권리 관계’도 문제다. NFT는 하나뿐이라, 도난 사실과 토큰 이력은 온체인에서 쉽게 확인되지만, 실제로는 도난 NFT가 할인 가격에 재판매되는 일도 적지 않다. 이 경우 회수 가능성, 소유권 분쟁 등 복잡한 쟁점이 뒤따르며, 보험사는 이를 모두 감안해 인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이 같은 복잡성 탓에, 최근까지 리테일 투자자를 위한 순수 NFT 보험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다. 2022년 한 분석에 따르면 “발행 시점 기준, 일반 소비자가 접근 가능한 NFT 전용 보험 상품은 Coincover를 통한 단 한 가지뿐”이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해당 상품은 개인 기준 최대 10만 달러 한도로 NFT를 포함한 디지털 자산을 보장하는 구조였다. 같은 해 3월 중개사 IMA는 NFT 리스크 평가·언더라이팅 R&D에 투자하겠다고 밝히며, 이 공백 시장을 새로운 기회로 보고 있음을 드러냈다.
NFT의 추가 리스크로는 ▲NFT 자체 혹은 마켓플레이스 스마트 컨트랙트 취약점(무단 전송·중복 발행 등) ▲오프체인 메타데이터 손실(IPFS·중앙 서버 장애 등으로 이미지·콘텐츠 접근 불가)이 대표적이다. 전통적 재산종·사이버 보장으로는 이러한 위험이 명확히 포함되지 않거나, 아예 암호화폐·디지털 토큰을 명시적 면책 대상으로 규정한 경우도 많다. 마켓플레이스·플랫폼 사업자는 사이버 보험으로 서버 해킹·장애 등에 대비할 수 있지만, 개인 컬렉터가 같은 수준의 보호를 받기는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전문화된 암호화 자산 보험이 필요하다. NFT 보험 설계 시 핵심 질문은 “무엇을 보험 대상으로 삼는가”다. ▲온체인 토큰만 담보하는지, ▲기저 미디어(이미지·동영상)까지 포함하는지, ▲메타데이터의 유효성·접근성을 어디까지 보장하는지 등을 명확히 해야 한다. Coincover의 샤론 헨리 부사장은 Motley Fool 인터뷰에서 “무엇에 대한 보호를 사는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 토큰인가, 메타데이터의 유효성인가… 자신이 어떤 보호를 구매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NFT 시장이 아직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한 만큼, 보험 약관도 진화 중이다. 현재로선 손해 발생 시 어떤 상황이 청구 요건에 해당하는지, 약관을 세밀히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시장이 안정되고 손실 데이터가 쌓이면, 미술품 보험처럼 NFT의 특수성을 반영한 전용 상품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 시점에서 NFT는 주로 지갑 단위 보험에 함께 포함되거나, 일부 고액 소유자를 대상으로 한 맞춤형(bespoke) 계약 형태로만 보장되는 수준이다.
3. 디파이(DeFi) 포지션: 코드·경제 설계·오라클이 얽힌 복합 리스크
Aave 같은 대출 프로토콜에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Uniswap 등에서 LP(유동성 공급자)로 참여하고, 일드 파밍·수확형(yield aggregator) 상품에 투자하는 등 디파이에 참여하는 투자자는 단순 보유와는 전혀 다른 리스크에 노출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 컨트랙트 리스크다. 프로토콜 코드의 취약점이 발견되면, 공격자는 이를 이용해 유동성을 싹쓸이할 수 있다. 2021년 한 해에만 디파이 해킹·익스플로잇으로 인한 손실이 105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된다. Rari Capital의 재진입(reentrancy) 취약점 악용으로 약 8000만 달러가 유출된 사건, 플래시론을 활용해 거버넌스 투표권을 집중시킨 뒤 악성 제안을 통과시켜 1억8100만 달러를 탈취한 Beanstalk 공격 등이 대표적 사례다.
경제 설계 자체의 실패도 치명적이다. 코드상 버그가 없더라도, 토큰 이코노미·담보 구조 등이 특정 시장 스트레스 상황을 견디지 못하면 시스템이 붕괴한다. 2022년 5월 알고리듬 스테이블코인 TerraUSD(UST)의 붕괴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UST는 설계상 메커니즘이 ‘코드대로’ 작동했음에도, 시장 신뢰가 무너지자 1달러 페그를 잃고 사실상 휴지조각이 됐다. 추산 170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했지만, 이는 전통적 의미의 해킹이 아닌 경제 시스템 붕괴였다. 그럼에도 일부 보험사는 이 같은 사건을 겨냥한 ‘디페그(depeg) 보험’ 상품을 설계해, 특정 스테이블코인 가격이 일정 범위 아래로 이탈할 경우 손실 일부를 보상해 주기도 했다.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오라클(oracle) 리스크다. 많은 디파이 프로토콜은 담보평가·청산 트리거를 위해 외부 가격 피드에 의존한다. 오라클이 장애·지연·오류를 일으키거나, 유동성이 얕은 마켓의 가격을 공격자가 의도적으로 왜곡할 경우, 잘못된 가격을 기반으로 담보 청산·대출 실행이 이뤄질 수 있다. 2022년 Inverse Finance의 1500만 달러 손실 사건이 전형적인 사례다. 공격자는 거버넌스 토큰 가격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담보가 과대평가되도록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과도한 대출을 실행해 자금을 빼냈다.디파이 고유의 온체인 자동화 구조를 겨냥한 공격은 다른 자산군에서는 보기 힘든 유형으로,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하며 디파이 전체 손실 가운데 수억 달러를 차지하는 수준까지 커졌다.
또 다른 핵심 위험은 탈중앙 프로토콜에서의 거버넌스 공격이다. 프로젝트의 거버넌스 토큰이 소수 지갑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거나, 시장에서 저렴하게 대량 매집이 가능할 경우 악의적 행위자가 필요한 물량을 확보해 자금 이동을 승인하는 제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앞서 언급한 Beanstalk 해킹이 대표적이다. 공격자는 짧은 시간 동안 의결권을 사실상 장악한 뒤, 자신에게 자금을 송금하는 제안을 상정·통과시키고 곧바로 출금하는 방식으로 프로토콜 자금을 탈취했다.
마지막으로, 디파이와 중앙화 금융(CeFi)을 잇는 수탁·커스터디 리스크도 무시할 수 없다. 상당수 디파이 이용자는 여전히 법정화폐 온램프·오프램프나 체인 간 자금 이동을 위해 중앙화 거래소에 의존한다. 이런 중앙화 사업자가 인출을 중단하거나 파산할 경우(2022년 Celsius, Voyager 사례처럼), 사용자들은 디파이 포지션은 유지한 채 온·오프램프 자금이 ‘발이 묶이거나’ 사실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거래소 디폴트” “수탁자 리스크”를 보장하는 커버 상품이 등장했다. 특정 거래소가 자산 인출을 중단할 경우, 디파이 커버 프로토콜이 보험금(커버 금액)을 지급하는 구조다. 엄밀히 말해 이는 스마트컨트랙트 결함이 아니라 CeFi 측의 실패지만, 그 여파가 디파이 이용자에게 직격탄이 된다는 점이 인식되면서, 이 간극을 메우는 보호 장치가 일부 상호부조회 형태로 제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위험 유형이 다층적인 만큼, 전통 보험과 구분되는 새로운 범주의 보험, 이른바 “디파이 커버(DeFi cover)” 시장이 생겨난 배경은 분명하다. 현재 디파이 커버 상품은 대략 8개 안팎의 큰 카테고리로 나뉘어 제공되고 있다. 프로토콜 해킹 커버, 스테이블코인 디페깅(depeg) 커버, 수익형 토큰 커버(예: Yearn 볼트의 가격이 손실로 인해 괴리될 경우를 보장) 등이 대표적이다. 각 상품마다 보장 개시 조건과 면책 사유가 세세하게 다르며, 업계 차원의 표준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프로토콜 커버라고 하더라도 기술적 취약점, 운영 상의 실수, 나아가 거버넌스 공격까지 포함하는지 여부는 제공자마다 정의가 다르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약관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 어떤 커버는 ‘어떤 형태의 해킹이든’ 지급 대상이 되지만, 다른 커버는 ‘자금이 영구히 회수 불능’인 경우에만 지급하는 식이다. 따라서 공격자가 자금을 다시 돌려준 경우, 손실이 복구됐다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이 안 될 수도 있다.
결국 디파이 포지션은 위험은 크지만 보험 수요도 그만큼 큰 자산군이다. 스테이블하게 규제·보증장치가 깔려 있는 은행 예금과 달리, 스마트컨트랙트에 자산을 예치하는 순간 해당 코드와 설계 리스크를 온전히 떠안게 된다. 코드가 망가지면 자산은 사실상 영구 손실이 될 수 있다. 디파이용 크립토 보험은 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다. 다만 현재 보험으로 커버되는 디파이 총예치자산(TVL)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 그럼에도 UST 붕괴 같은 ‘악몽 사례’가 누적되면서 커버에 대한 사용자 관심은 뚜렷이 커졌다. 2022년 UST 디페깅은 디파이 보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Nexus Mutual, InsurAce, Risk Harbor 등 여러 커버 프로토콜이 UST 및 관련 프로토콜의 디페깅 위험에 대비한 커버에 대해 총 2,200만~2,500만 달러 규모의 보험금을 실제로 지급했다. 특히 InsurAce의 경우 UST 디페깅 청구의 약 98%를 승인해 지급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이 지급 사례들은 “위기 때 정말 돈을 내주는지”라는 시장의 의구심을 상당 부분 해소하며, 일부 투자자를 사실상 ‘전면 손실’에서 구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테라 사태 이후 InsurAce 팀 구성원 입에서 “보험의 필요성이 이처럼 명확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요약하면, 크립토 이용자들은 도난·해킹, 기술적 결함, 사용자 실수, 사기, 나아가 규제당국의 압류·동결 가능성까지(예: 특정 프로토콜이나 주소가 제재 대상이 되어 자금 접근이 차단되는 경우) 복합적인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 전통 보험은 이런 리스크를 암호화폐 컨텍스트에서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특화된 크립토 보험 상품이 진화 중이다. 개인 지갑이 해킹당하거나, 고가 NFT가 도난당하거나, 디파이 이자 농사 전략이 버그로 붕괴하는 등 시나리오는 다채롭지만, 구조와 위험을 이해하는 것이 리스크 관리의 첫걸음이다. 이제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 짚어봤으니, 실제로 이러한 사건에 대비한 보호를 제공하는 주체들, 즉 중앙화·탈중앙화 크립토 보험 제공자들을 살펴볼 차례다.
중앙화 vs 탈중앙화 크립토 보험 제공자
현재 크립토 보험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전통 보험사의 틀을 따르는 중앙화 보험·브로커 모델과, 블록체인·토큰·커뮤니티 기반의 위험 풀링을 전면에 내세운 탈중앙화 보험 플랫폼 모델이다. 둘 모두 크립토 관련 리스크를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구조와 작동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먼저 각 모델을 살펴본 뒤, 주요 플레이어와 상품, 보장 범위·신뢰도 측면에서의 차이를 비교해본다.
전통·중앙화 보험 제공자
중앙화 진영에는 외형상 기존 손해보험사·전문 브로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조직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은 통상적인 법적 보험계약 형태로 보장을 인수하고, 대형 보험사의 자기자본 또는 런던 로이즈(Lloyd’s of London) 마켓을 통한 공동 인수 구조를 활용한다. 대부분 고객에게 KYC(고객신원확인)를 요구하며, 일반 개미 투자자보다는 기업·기관·고액자산가를 주력 고객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규제 준수와 업계 신뢰라는 장점을 갖는 대신, 인수 심사가 길고, 보장 범위가 좁거나 기준이 엄격해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런던 로이즈는 크립토 보험 발전 과정 전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로이즈는 단일 보험사가 아니라 각기 다른 **신디케이트(syndicate)**가 위험을 분담해 인수하는 일종의 보험 마켓플레이스다.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로이즈 신디케이트가 크립토를 겨냥한 혁신적 상품을 선보였다. 2020년 소개했던 Atrium 신디케이트의 코인커버(Coincover)와의 핫월렛 도난 보장 상품이 대표적이다. 해당 상품은 암호화폐 시세에 연동되는 동적 한도를 적용해, 핫월렛 해킹 피해를 로이즈 보증으로 최초로 커버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다. 이 상품은 Tokio Marine Kiln, Markel 등 대형사를 포함한 복수 로이즈 보험사가 ‘Product Innovation Facility’라는 혁신 상품 전용 플랫폼을 통해 공동 인수했다. 수백 년간 선박·보물선을 인수해온 로이즈가 디지털 토큰까지 보험 포트폴리오로 편입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례로 평가된다.
로이즈 혁신 책임자는 당시 “암호화폐를 보호할 수 있는 보험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고 있다… 로이즈는 여러 신디케이트가 힘을 합쳐 새로운 위험을 인수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 덕분에 보험 혁신의 자연스러운 홈그라운드”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 ‘협업형 인수 모델’은 크립토처럼 규모가 크고 복잡한 리스크를 나눠 떠받치기에 적합하다.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여러 신디케이트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커스터디 업체 Kingdom Trust의 보험, 그 밖의 여러 대형 계약도 이런 구조를 활용했다.
2023년에는 로이즈의 Arch Syndicate 2012(운용사: Arch Capital)가 크립토 전문업체 Evertas와 손잡고, 커스터디 자산을 대상으로 하는 4억2,000만 달러 규모의 보험 한도를 승인했다. 구조를 보면, 전통 보험사 Arch가 인수 역량(capacity)을 제공하고, 로이즈 커버홀더 자격을 가진 Evertas가 Arch를 대신해 위험 평가·언더라이팅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Evertas는 “단일 보험사가 제공하는 최대 규모의 크립토 보험 한도”라며, 여러 보험사가 나눠 인수하던 관행에서 한 걸음 나아간 사례라고 자평했다. FTX 붕괴 이후 거래소 등 대형 사업자에 대한 안전망 요구가 커진 상황에서, 로이즈 신디케이트의 이런 행보는 업계 전반의 보험 커버 캐퍼시티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로이즈 외에도 전통 보험·브로커 업계의 여러 플레이어가 디지털 자산 전담 조직을 꾸리고 있다. 글로벌 브로커 Aon, Marsh는 각각 디지털 자산 리스크 팀을 구성해 수십 개 크립토 기업의 보험 프로그램을 설계·배치해 왔다. Marsh는 과거 Coinbase의 1억5,000만 달러 규모 초과(excess) 보험 프로그램과 Gemini의 캡티브(captive) 구조 설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험사 측에서는 세계 최대 재보험사 중 하나인 Munich Re가 비교적 일찍부터 크립토 리스크 연구에 나섰고, 스타트업 대상 재보험 제공도 시작했다. 2022년 파일럿 형태로 진행된 스마트컨트랙트 보험사 Chainproof의 초기 상품에도 Munich Re가 재보험자로 참여했다. 일본의 대형 손보사 손포(Sompo)는 Chainproof에 직접 지분 투자하고 언더라이팅을 지원하고 있다. Allianz 역시 자체적인 크립토 보험 상품을 개발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특수보험사 Arch는 로이즈 신디케이트 활동과 별도로, 영국 법인 Arch Insurance (UK)를 통해서도 크립토 리스크를 직접 인수하고 있다.
한편 런던·유럽 시장의 중소 전문 보험사들 — 특히 사이버 보험이나 귀금속·현금 수송(specie) 분야에 강점을 지닌 플레이어 — 도 개별 딜 단위로 크립토 리스크 인수를 늘리는 추세다. 미국에서는 전미보험감독관협회(NAIC)가 보험사의 크립토 익스포저에 대해 경고를 내리고, 규제 보험사가 자체 자산으로 암호화폐를 보유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지만, 고위험 특수 계정인 서플러스 라인(surplus lines) 보험사를 통한 틈새 시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가운데 코인커버(Coincover) 는 인슈어테크(Insurtech)와 크립토를 잇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2018년 영국에서 설립된 코인커버는 엄밀한 의미의 보험사라기보다는 “크립토 보안·보험 솔루션 제공업체”를 자처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것은 기술과 보험의 결합이다. 예를 들어 개인·기관 지갑의 프라이빗 키를 암호화해 백업하고, 온체인 트랜잭션을 모니터링해 이상 징후를 포착하는 시스템을 제공하되,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그 손실을 보전하는 보험 지원 보증(insurance-backed guarantee) 을 붙이는 식이다. 일부 지갑 서비스·거래소는 자사 고객 보호 레이어를 강화하기 위해 코인커버의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 한 로펌의 분석에 따르면, 코인커버는 Crypto.com을 포함한 약 20여 개 지갑·거래소 이용자를 대상으로 보안 서비스와 제한적인 보장(coverage)을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하드웨어 지갑 제조사 Ledger 와의 제휴다. Ledger는 선택형 서비스인 Ledger Recover 를 출시하면서, 사용자의 키를 조각내 암호화해 보관하는 동시에, 문제 발생 시 보험 지원을 받는 구조를 코인커버와 함께 구축했다. 이는 ‘지갑 보안 솔루션 + 보험 보증’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형태로, 전통 인슈어테크와 크립토 보안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모델로 평가된다.서비스 장애 시 보상을 제공한다. NFT 영역에서 보면, 코인커버(Coincover)는 2022년 소비자 NFT 보장 상품을 내놓으며 최대 10만 달러까지 보호해 주는 구조를 도입했다. 코인커버는 실질적으로 ‘보험 인수자’라기보다 ‘고객 접점 역할을 하는 중개 플랫폼’에 가깝다. 실제 위험 인수는 로이즈(Lloyd’s) 신디케이트 등 대형 보험사가 맡고, 코인커버는 브랜드와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담당한다. 이용자 관점에서는 자신의 지갑이 코인커버 보호를 적용받는다면, 예를 들어 지갑 서비스 제공업체 시스템이 해킹되어 자산이 유출됐을 때 일정 조건 하에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셈이다.
코인커버의 사례는 전통적(중앙화) 사업자가 크립토 플랫폼과 협업하는 전형적 방식을 잘 보여준다. 개별 리테일 고객에게 직접 보험증권을 판매하기보다는, 지갑 서비스나 거래소와 제휴해 ‘부가 서비스’ 형태로 보험을 번들링해 제공하는 구조다. 이렇게 하면 유통이 훨씬 수월해지고, 파트너사가 코인커버의 기술 요건을 충족해야 하므로 보안 수준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코인커버의 존재와 성장 자체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크립토 보험에서는 기술적 리스크 관리와 보험 제공이 사실상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점이다. 보험사는 멀티시그 지갑, 강력한 암호화, 상시 모니터링 등 견고한 보안 체계를 전제로 하고 싶어 하며, 때로는 보험사나 인슈어테크 업체가 직접 그 보안 도구를 제공해 사고 발생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줄이려 한다.
또 다른 핵심 중앙화 사업자는 체인프루프(Chainproof)다. 앞서 설명했듯, 체인프루프는 디파이(DeFi) 스마트 콘트랙트를 정조준한 ‘규제 인가’ 보험사다. 전통 보험사와 마찬가지로 정식 보험 구조(보험증권 발행, 사고 접수 및 손해사정, 버뮤다 당국의 규제 감독 등)를 따르지만, 언더라이팅(인수 심사)은 블록체인 보안 전문성을 깊게 녹여 설계한다. 체인프루프를 인큐베이팅한 퀀트스탬프(Quantstamp)는 사실상 기술 인수인 역할을 했다. 2,000억 달러 이상 규모의 디지털 자산을 감리·감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디파이 프로토콜의 리스크를 평가한 것이다.
체인프루프의 출범이 의미 있었던 이유는, 디파이에 관심은 있지만 규제 미비 탓에 무허가 크립토 상호부조(Mutual) 모델을 사용할 수 없었던 기관 투자자들을 겨냥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 헤지펀드가 디파이 프로토콜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싶어도, 내부 규정상 ‘해킹 리스크가 규제 인가 보험사에 의해 커버되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도록 막는 경우가 있다. 이때 소 pomp와 뮌헨리(Munich Re)가 뒷단에서 지원하는 체인프루프가 해당 헤지펀드에 정식 보험증권을 발행해 주면, 펀드 리스크위원회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구조다. 체인프루프는 초기에는 감사를 마친 일부 디파이 프로토콜을 대상으로 약 1,000만 달러 수준의 한도를 설정한 파일럿 커버를 제공한 뒤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전략을 세웠다. 동시에 글로벌 재보험사들로부터 재보험 지원 서한을 확보했는데, 이 역시 상징적이다. ‘리스크가 적절히 구조화되기만 한다면’ 전통 재보험 시장도 크립토 리스크를 떠안을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러 파이낸스(Euler Finance) 측이 온체인 보험사를 검토했다는 루머 등과 맞물려, 체인프루프는 중앙화 자본과 크립토 특화 리스크 모델링이 점차 수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례로 꼽힌다.
미국 기반 크립토 전문 보험사 에버타스(Evertas)도 빼놓을 수 없다. 에버타스는 ‘크립토만을 위한 보험’을 표방한 선발 스타트업 중 하나로, 버뮤다 보험사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2022년에는 로이즈 커버홀더 지위도 확보했다. 전략은 명확하다. 로이즈의 아치(Arch) 등 대형 보험사와 긴밀히 협업해 보장 한도를 키우고, 거래소·수탁기관·마이닝 장비 등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보험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것이다. 2023년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에버타스와 아치가 설계한 4억2,000만 달러 규모 단일 보험 프로그램은 크립토 마이닝 하드웨어만 놓고도 최대 2억 달러까지 커버할 수 있게 했다. 대형 마이닝 팜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재산보험’인 셈이다.
이처럼 에버타스가 키 도난(범죄)뿐 아니라 마이닝 인프라(재산)까지 아우르는 상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크립토 보험 시장 성숙의 또 다른 신호다. 에버타스에 따르면 현재 보험에 의해 보호되는 크립토 자산은 전체의 2~3% 수준에 그치지만, 보수적인 전통 보험사들도 “이제는 사업성과 수요가 충분하다”고 판단하며 점진적으로 이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에버타스와 유사한 업체들은 범죄보험(개인 키 절도 시 보상)부터 금괴·현물 보관을 떠올리게 하는 스피시(specie) 보험(금고 내 자산을 보장), 크립토 서비스 사업자가 소송을 당했을 때를 대비한 전문직 배상책임(Professional Liability)까지 다양한 상품을 언더라이팅한다. 요컨대 기존 보험 라인업(재산, 범죄, 배상책임, 임원배상(D&O) 등)을 ‘크립토 맥락’에 맞게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크립토 거래소를 위한 Tech E&O(기술 오류·누락) 또는 사이버 보험은 보안 침해로 인한 손실을 커버할 수 있고, 크립토 기업 경영진을 위한 D&O 보험은 경영 실패나 오남용 의혹으로 투자자 또는 규제 당국으로부터 소송·조사를 받을 경우 방어 비용을 보장하게 된다. 실제로 크립토 업계에서도 이런 사례가 이미 적지 않게 발생했다.
다만 중앙화 크립토 보험사들은 보장 한도에 엄격한 상한을 두고 까다로운 조건을 부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다수 상품은 매우 세밀한 인수 심사를 전제로 한다. 신청자의 보안 프로세스를 샅샅이 점검하고, 외부 보안 감사나 규정 준수를 요구하며, 특정 리스크에는 별도의 서브리밋(부분 한도)이나 면책 조항을 걸어두는 식이다. 커스터디안(수탁 기관) 보험에서 흔한 면책 예시는 ‘수탁 기관 직원의 중대한 과실’이나 ‘수탁 범위를 벗어난, 이용자 측 과실에 의한 손실’이다. 또 다른 대표적 제한 사항은 ‘절도에 의한 손실’만 보장하고, 원인 불명이거나 절도 여부를 입증할 수 없는 자산 소실은 제외하는 조항이다. 이는 단순 해킹인지 내부자 범행인지 불분명한 손실을 둘러싼 분쟁을 피하려는 목적에서다.
보험금 지급 수단도 고민거리다. 보험사는 보상을 법정화폐로 지급할지, 크립토로 지급할지, 혹은 선택권을 줄지를 결정해야 한다. 가격 변동성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래소가 1억 달러 상당 비트코인을 보험에 가입했는데, 비트코인 가격이 두 배로 뛰었다면, 별도 상한 설정이 없다면 보험사는 2억 달러 가치를 떠안게 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코인커버와 로이즈가 설계한 ‘동적 한도’ 구조가 주목을 받았다. 실시간 코인 가격에 연동해 보장 한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장치가 없다면, 보험사는 대개 법정화폐 기준으로 고정 한도를 정하고, 갱신 시점마다 이를 재조정하는 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한다.
중앙화 사업자의 보장 한도는 천차만별이다. 작은 스타트업은 500만 달러 수준 커버에 그치는 반면, 대형 거래소는 레이어 구조를 통해 총 1억~7억5,000만 달러 규모 보장을 조달하는 사례도 나온다. 다만 이 역시 단일 보험사가 통으로 인수하기보다는 여러 보험사가 5,000만 달러씩 나눠 인수하는 식으로 총 한도를 쌓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치·에버타스의 4억2,000만 달러 단일 프로그램은 상당히 이례적인 편이고, 통상적으로는 여러 보험사가 수천만 달러 단위로 참여해 복수의 담보 형태로 수백억~수천억 원대 리스크를 나눠 떠안는다. 이에 비해 넥서스 뮤추얼(Nexus Mutual) 등 탈중앙 보험 풀의 경우 전체 자본이 많아야 수억 달러대에 불과해, 프로토콜별 보장 한도도 수백만 달러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신디케이트 풀 구조를 통해 개별 리스크당 최대 2,000만 달러까지 제공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중앙화 플레이어와의 격차는 크다.
탈중앙 플랫폼으로 넘어가기 전에, 눈에 띄는 중앙화 보험 제공자와 그 역할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로이즈 신디케이트(Atrium, Arch 등): 핫월렛 보장과 대형 커스터디 보험을 가장 먼저 개척한 플레이어. 주로 브로커를 통해 거래소, 수탁기관, 지갑 서비스 등을 인수한다. 로이즈는 여러 보험사가 리스크를 분산 인수할 수 있는 ‘시장 인프라’를 제공하면서, Product Innovation Facility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크립토 보험 혁신도 촉진하고 있다.
- 코인커버(Coincover): 인슈어테크 모델로, 개인·기업 지갑 보호 및 NFT 보장을 제공한다. 직접 인수자가 아니라, 언더라이터와의 제휴를 통해 특정 손실(지갑 해킹, ‘보호된 거래’ 서비스 이용 중 발생한 사기 등)을 커버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키 백업, 트랜잭션 스캐닝 등 예방 조치와 보험 기반 보증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 에버타스(Evertas): 로이즈 및 기타 시장에서 활동하는 크립토 전문 보험사로, 대형 크립토 기업을 대상으로 한 상업용 대형 계약에 초점을 맞춘다. 스스로를 ‘첫 전업 크립토 보험사’로 내세우며, 아치 등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수용 용량(capacity)의 상한을 꾸준히 넓혀왔다.
- 체인프루프(Chainproof): 기관용 디파이 커버를 제공하는 규제 인가 디파이 보험사. 전통 보험사의 자본을 백업으로 두되, 크립토 보안 전문가가 운영하는 구조로, 기존 보험이 거의 손댄 적 없던 ‘비수탁(non-custodial) 리스크’—즉 스마트 콘트랙트 리스크—에 집중한다.
- 전통 브로커(Aon, Marsh) 및 보험·재보험사(Munich Re 등): 크립토 커뮤니티 입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뒤에서 구조를 설계하는 조력자다. 이들이 많은 거래소에 ‘조용히’ 보험을 붙여왔고, 공개 여부는 거래소 선택에 맡겨졌다. 예컨대 로빈후드(Robinhood)는 로이즈를 통한 크립토 자산 커버를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으며, 코인베이스(Coinbase)와 제미니(Gemini)도 이러한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중앙화 보험사는 단순 절도 보장을 넘어 전문직 배상책임과 규제·컴플라이언스 관련 담보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크립토 수탁기관의 경우 전통 금융권의 ‘금융기관 보증(Financial Institutions Bond)’ 또는 범죄 보증(Crime Bond)이 요구되곤 하는데, 처브(Chubb), 트래블러스(Travelers) 같은 보험사들은 여기에 크립토를 다룰 수 있는 특약(endorsement)을 붙이기 시작했다. 크립토 기업을 위한 D&O 보험도 최근 뜨거운 분야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투자자 소송이나 규제 조사 가능성이 상존하는 만큼, 이에 대비한 방어장치를 원한다. 홍콩처럼 가상자산 거래 플랫폼 규제가 본격 가동되는 시장에서는, 규제 리스크에 대응하는 D&O 커버가 경영진 보호의 핵심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이 모든 흐름은 여전히 중앙화 보험 영역에 속하지만, 법·규제의 불확실성이 점차 해소되면서 관련 상품이 서서히 표준화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탈중앙 보험 플랫폼
이와 병행해, 이른바 ‘디파이 보험’ 또는 ‘커버 프로토콜’로 불리는 탈중앙 보험 플랫폼 생태계도 빠르게 성장해 왔다. 이들 플랫폼은 주로 이더리움 및 호환 체인 위에서 돌아가며, 스마트 콘트랙트·토큰·커뮤니티 거버넌스를 활용해 보장을 제공한다. 대개 전통적 의미의 보험사 라이선스는 보유하지 않으며, 법적 의미의 “보험”이라기보다는 특정 사건 발생 시 구성원 간 손실을 보전해 주는 ‘조합/상호부조 성격의 DAO(탈중앙 자율조직)’로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일부 관할지역에서는 이들을 ‘자기보험’ 또는 상호부조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하지만, 경제적 기능 측면에서는 전통 보험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주요 탈중앙 보험(커버) 프로토콜과 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넥서스 뮤추얼(Nexus Mutual)
2019년 출시된 넥서스 뮤추얼은 디파이 보험의 사실상 개척자로 평가된다. 넥서스는 법적으로는 ‘보험사’가 아닌 재량형 상호조합(discretionary mutual) 구조를 취한다. 즉, 약관상 세부 요건이 완벽히 충족되지 않더라도 조합원들의 판단에 따라 청구를 지급할 수 있는 재량이 있다. 이 유연성 때문에 법적으로는 ‘보험(insurance)’이라는 용어를 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조합원 입장에선 보험에 매우 가깝게 작동한다.
출시 초기 넥서스는 스마트컨트랙트 커버에 집중했다. 각종 디파이 프로토콜의 스마트컨트랙트 코드에 존재하는 취약점·버그·해킹 등으로 인한 예상치 못한 손실을 보장하는 상품이다. 이후 중앙화 거래소 파산·커스터디 업체 지급불능, 스테이블코인 디페깅(depeg)까지 커버 범위를 넓혔다.
넥서스를 이용하려면 우선 조합원이 돼야 한다. 기본적인 KYC를 거친 뒤 멤버십 토큰인 NXM을 최소 수량 이상 매입해야 한다. 보험료(프리미엄)는 NXM 또는 ETH로 납부하며, 보험금 청구는 조합원들의 투표를 통해 심사된다. 넥서스는 ETH를 중심으로 한 자본 풀(capital pool)을 운용해 모든 활성 커버를 담보하며, 이 풀의 건전성은 본딩 커브(bonding curve) 메커니즘을 통해 관리된다. 본딩 커브는 풀의 자산과 부채 규모에 따라 NXM 가격을 자동 조정하는 일종의 온체인 보험 재무제표 역할을 한다. 2024년 말 기준 넥서스 뮤추얼의 자본 풀 규모는 약 2억달러(ETH 기준) 수준이었다. 이 풀 규모가 곧 인수능력 한도이기에, 프로토콜별·상품별 최대 보장한도를 설정해 운용한다.
넥서스는 최근 내부에 ‘신디케이트(syndicate)’ 풀 개념을 도입해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특정 리스크에 직접 스테이킹하고 더 높은 수익률을 얻는 구조로, 런던 로이즈(Lloyd’s of London)의 신디케이트 구조와 유사하다. 창업자 휴 카프(Hugh Karp)는 넥서스 조합원을 로이즈의 ‘네임(Names)’ 투자자에 비유하며, 리스크를 인수하고 그 대가로 수익을 얻는 구조라고 설명한 바 있다.
실적도 주목할 만하다. 2019년 출범 이후 약 50억달러 규모의 커버를 인수했고, 2020년 메이커다오(MakerDAO) 시스템 불안정 사태와 여러 거래소 해킹 등 각종 사건에서 총 1,800만달러 상당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합원들은 넥서스의 평판과 신뢰가 곧 토큰 가치와 사업 지속성에 직결된다는 점을 알고 있어, 대체로 정당한 청구에 대해선 지급에 찬성하는 쪽으로 표를 던져 왔다.
다만 비판도 있다. NXM 토큰 보유자가 곧 자본 풀의 이해당사자이기 때문에, 이들이 손실을 줄이려는 유인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정당한 청구를 과도하게 거부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경쟁사 리스크 하버(Risk Harbor) 등은 이런 이해 충돌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기도 했다. 실제로 2020년 bZx 해킹 사건 당시 넥서스는 약관 문구를 이유로 초기 청구를 거절해 상당한 논란을 낳았다. 이후 관련 약관을 손질하고, 2021년 이어파이낸스(Yearn Finance) 익스플로잇 사건에서 약 240만달러를 지급하는 등 고액 청구에 응하며 신뢰 회복에 나섰다.
넥서스의 거버넌스 및 청구 프로세스는 탈중앙 보험에서 핵심 쟁점이다. 넥서스는 토큰을 스테이킹한 청구 심사자(claim assessor)들의 정족수(quorum)와 과반 투표로 지급 여부를 결정한다. 잘못된 ‘거절’ 의사결정에 대해선 이론상 상위 거버넌스가 뒤집을 수 있는 백스톱(backstop)을 두고 있지만, 실제 활용된 사례는 많지 않다. 아울러 넥서스는 규제 이슈에 대한 보수적인 접근을 택해 KYC를 요구하고 미국 이용자 등을 지리적(Geo)으로 차단한다. 운영 메커니즘은 탈중앙화돼 있지만, 참여 자체는 완전한 퍼미션리스 구조는 아닌 셈이다.
인슈어에이스(InsurAce)
2021년 초 가동을 시작한 인슈어에이스는 또 다른 대표 디파이 보험 프로토콜이다. 초기부터 멀티체인 사용자 친화 플랫폼을 표방하며 이더리움에서 출발해 바이낸스 스마트 체인, 폴리곤, 아발란체 등으로 빠르게 확장했다. 인슈어에이스의 차별점은 ‘포트폴리오형 커버’ 모델이다. 하나의 커버로 여러 프로토콜과 자산을 동시에 보장하는 구조를 도입해 보험료 효율을 높인 점이 새로웠다.
프로토콜 토큰인 INSUR는 거버넌스 참여, 자본 공급자·청구 심사자 보상 등에 쓰인다. 청구 절차는 INSUR 스테이커들의 커뮤니티 투표를 거치는 구조로, 기본 골격은 넥서스와 비슷하지만 자체 토큰을 활용한다.
인슈어에이스의 전환점은 2022년 5월 테라 UST 디페깅 사태였다. 인슈어에이스는 UST가 특정 가격 이하로 떨어질 경우 지급하는 ‘UST 디페깅 커버’를 상당 규모 판매했다. UST가 사실상 붕괴하자, 인슈어에이스는 디페깅 발생 후 48시간 만에 청구 절차 개시를 선언했고, 최종적으로 155명에게 약 1,200만달러 상당을 지급했다. 회사 측은 당시 청구 승인 비율이 98%에 달했다고 밝혔다. 신속한 대응은 인슈어에이스의 신뢰도를 크게 높였고, Cointelegraph 등 주요 매체 역시 UST 홀더를 ‘구제’한 사례로 조명했다.
하지만 논란도 없지 않았다. 인슈어에이스는 UST 커버에 한해 통상 15일이던 청구 접수 기간을 7일로 단축한다고 돌연 발표해, 일부 이용자들이 사후적으로 지급을 회피하기 위한 조치라며 반발했다. 인슈어에이스는 극단적 시장 상황에서 리스크 관리상 불가피했다고 해명했지만, 탈중앙 보험 역시 이해상충이 의심되는 거버넌스 결정이 내려질 경우 신뢰 훼손 리스크가 크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테라 사태 이후 인슈어에이스는 140개 프로토콜, 약 3억4,000만달러 상당 자산에 대해 커버를 제공했다고 보고했으며, 토크노믹스와 기능을 재설계한 ‘v2’ 출시를 준비하는 등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리스크 하버(Risk Harbor)
리스크 하버는 아예 청구 과정에서 ‘거버넌스’를 제거하겠다는 철학으로 출발했다. 2021년 중반 판테라캐피털(Pantera Capital), 코인베이스 벤처스(Coinbase Ventures) 등의 투자를 받아 론칭했으며, ‘파라메트릭(parametric) 디파이 보험 마켓플레이스’를 표방한다.
리스크 하버에서 커버를 구매하면, 지급 조건은 스마트컨트랙트에 사전 명시된다. 예를 들어, 특정 풀의 토큰 가격이 해킹으로 X% 이상 급락하면 1 ETH를 지급하는 식이다. 해당 조건을 충족하는지 여부는 온체인 가격, 교환 비율, 상환 가능 비율 등으로 기계적으로 판별한다. 조건이 충족되면 콘트랙트가 자동으로 유동성 풀에서 보험금을 지급하며, 사람의 개입이나 투표는 필요 없다.
리스크 하버의 창업자들은 재량적 심사(discretionary assessment)가 개입되면 필연적으로 편향이 생긴다고 비판한다. “거버넌스 프로세스가 최종 판단을 내리는 구조에서는, 자기 자본을 지키기 위해 청구를 정당하지 않다고 보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제시한 해법은 기준을 전부 온체인에 박아두는 것. 파라미터가 충족되면 무조건 지급되고, 아니면 지급되지 않는 구조로 ‘여지’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이다.
이런 구조를 전통 금융에서는 파라메트릭 보험이라 부른다. 허리케인 시 풍속이 특정 수준을 넘으면 자동 지급되는 상품처럼, 조정인의 판단이 아닌 객관적인 지표(파라미터)에 따라 지급이 트리거된다. 디파이에서는 자산 가격, 온체인 상환 가능 여부 등이 그 역할을 한다.
리스크 하버는 스테이블코인 디페깅 커버(테라 붕괴 이후 테라 자체 보험 프로토콜이었던 Ozone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수익 토큰 보호(yield token protection·cUSDC 등 이자 발생 토큰이 1:1 상환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보장) 등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플랫폼은 양면 마켓플레이스 구조를 띤다. 커버 구매자는 보험료를 지불하고 보호를 받으며, 언더라이터(자본 제공자)는 풀에 자본을 공급해 보험료 및 이자 수익을 얻는다. 언더라이터는 결국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것’에 베팅하는 셈이다. 사고가 없으면 보험료를 고스란히 수익으로 챙기고, 사고가 나면 일부 자본을 보험금 지급에 사용한다.
리스크 하버의 핵심 혁신은 신뢰에 의존하지 않는(trustless) 즉시 지급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DAO가 제때, 공정하게 청구를 승인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이용자에게 매력적이다. 다만 적절한 파라메트릭 트리거를 설계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기준이 너무 좁으면 실제 손실이 발생해도 보장이 안 되는 ‘과소보장(오탐 누락)’ 문제가 생기고, 너무 넓으면 경미한 상황에도 보험금이 나가는 ‘과다보장(오탐 발생)’ 리스크가 커진다.
리스크 하버는 일부 상품에서 외부 오라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프로토콜 자체의 온체인 상태—예컨대 수익 토큰이 본래 가치의 X% 이상으로 상환 가능한지 여부—를 트리거로 활용한다. 이는 별도 가격 오라클 조작 위험을 줄이는 장치다. 판테라캐피털의 공동 CIO 조이 크루그(Joey Krug)는 리스크 하버가 타 프로토콜 대비 더 높은 자본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평가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언더라이터 자본이 커버를 담보하는 동안에도 수익을 창출(보험 부채를 담보로 한 투자, 일명 인슈어런스 플로트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는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가 보험 플로트를 운용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언슬래시드 파이낸스(Unslashed Finance)
2021년 등장한 언슬래시드는 또 다른 디파이 커버 프로젝트로, 거래소 해킹, 프로토콜 해킹, 스테이블코인 디페깅, 크립토 헤지펀드 청산 등 다양한 이벤트를 대상으로 하는 상품을 선보였다. 언더라이터는 여러 리스크 ‘버킷(bucket)’에 자본을 공급해 보험료 수익을 얻는 구조다. 약 200만달러 시드 투자를 유치했고, 일부 유명 프로토콜·거래소를 대상으로 커버를 제공하며 초반에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언슬래시드가 시도한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는 보험 증권의 즉시 토큰화다. 이용자 커버를 NFT 형태로 발행해 2차 시장에서 거래하거나 양도할 수 있게 하는 구상이다. 청구 심사는 토큰 보유자의 이해상충을 줄이기 위해 독립적인 클레임 어세서(Claims Committee)가 담당하고, 의견이 갈릴 경우 중재(arbitration) 절차로 넘기는 구조였다. 실제로 2021년 크림 파이낸스(Cream Finance) 해킹 사건 등에서 일부 청구를 지급한 사례도 있다.
다만 최근 들어 프로젝트는 상당히 조용해졌고, 커뮤니티에서는 자본 인출 지연 등 운영상 난관이 제기되기도 했다. 보험 비즈니스는 초기에 충분한 자본과 신뢰를 확보하기가 특히 어렵다. 신뢰할 만한 지급 여력을 보여주려면 큰 풀(capital pool)이 필요하지만, 큰 풀을 만들려면 먼저 많은 이용자와 보험료 수입을 확보해야 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문제를 언슬래시드 역시 피하지 못한 셈이다.
셜록(Sherlock)
셜록은 조금 다른 길을 택한 플레이어다. 기본적으로는 스마트컨트랙트 보안 감사 및 버그바운티 플랫폼이지만, 자사 감사 서비스를 이용한 프로토콜에 ‘커버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보험 기능을 수행한다.
사업 모델은 B2B에 가깝다. 디파이 프로토콜이 셜록의 보안 감사를 거치면, 셜록은 해당 감사 대상 코드에서 발생한 익스플로잇으로 인한 손실에 대해 최대 200만달러까지 보장하는 커버를 제안한다. 프로토콜은 이를 위해 일종의 ‘보험료’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셜록에 지불한다. 한편 셜록은 스테이커들로부터 자본을 모아 커버 풀을 조성하며, 스테이커는 이자 수익과 함께 셜록 토큰(SHER) 보상을 받는다. SHER 토큰은 거버넌스와 보상 설계에 활용된다.
셜록은 내부에 숙련된 보안 전문가를 두고, 자체적으로 리스크를 평가해 ‘감사 + 커버’를 패키지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감사 품질과 리스크 인센티브를 최대한 정렬시키려 한다. 전통 금융으로 치면 ‘품질 보증형 보험이 붙은 감사 보고서’에 가깝다. 다만 셜록 역시 시험대에 오른 사례가 있다. 2023년 3월 발생한 율러 파이낸스(Euler Finance) 해킹 당시, 율러는 셜록의 감사를 받은 상태였고… (이후 사건 전개와 책임 범위, 청구 처리 방식 등이 시장의 관심을 집중시켰다).셜록이 커버했던 이른바 ‘Euler 해킹’ 사례에서는 보험금 지급 책임이 크게 불어났다. 다행히 해커가 상당수 자금을 반환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셜록 준비금이 사실상 전액 소진될 뻔했다는 점이 드러났다(DLNews 보도에 따르면 셜록 재무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며 지급여력 우려가 제기됐다). 셜록은 감사(audit)와 같은 리스크 완화 수단에 보험을 결합해 보다 포괄적인 보안 패키지를 만든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들 탈중앙 보험 솔루션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 지원 상품 범위: 탈중앙 플랫폼들은 처음에는 프로토콜 해킹(스마트 컨트랙트 오류)에 대한 커버에서 출발해, 이후 스테이블코인 디페깅, 커스터디/거래소 파산, 이자 토큰(수익 토큰) 커버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현재 Nexus Mutual과 InsurAce는 디파이 해킹부터 CeFi(중앙화 서비스) 사고까지 상당히 폭넓은 리스크를 포괄한다. Risk Harbor는 스테이블코인, 이자 토큰, 브리지 리스크 등 특정 파라메트릭(지표 연동형) 커버에 집중해왔다. 새로운 카테고리로는 지분증명(PoS) 네트워크 스테이커를 위한 ‘슬래싱 보험’이 부상 중인데, Chainproof가 이더리움 스테이킹 커버리지 영역에서 이와 유사한 시도를 했다.
- 보장 한도: 전통 보험에 비해 한도가 상대적으로 작다. 예를 들어 Nexus Mutual은 개별 프로토콜당 수백만 달러 수준의 보장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고, 최근에는 신디케이트 모델과 브로커 파트너십을 통해 리스크당 최대 2,000만 달러 온체인 커버를 내세운 신상품도 출시했다. InsurAce 역시 커버당 한도가 존재하며, 통상 개별 이용자 기준으로는 수백만 달러대(총액 기준 저수백만 달러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탈중앙 자본 풀은 익스포저(위험 노출)를 과도하게 키우지 않도록 보수적으로 운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로이즈(Lloyd’s)와 같은 전통 시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수억 달러 규모의 커버도 구조화가 가능하지만, 그만큼 비용이 높고 언더라이팅 과정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다.
- 클레임(보험금) 처리 방식: 판가름이 나는 핵심 차별 요소다.
- Nexus Mutual: 조합원 거버넌스 투표 구조다. 청구가 접수되면 NXM을 스테이킹한 클레임 평가단이 심사하고, 이들의 평가는 커뮤니티 투표로 확정된다. 잘못된 평가를 하면 스테이킹이 슬래시(차감)될 수 있어 인센티브가 설계돼 있다. 통상 수일 정도가 소요된다.
- InsurAce: 내부 심사 후 INSUR 토큰 스테이커 커뮤니티 투표를 거친다. UST 사건에서는 프로세스 개시 후 실제 지급까지 약 한 달이 걸렸다.
- Risk Harbor: 거버넌스 개입이 없다. 온체인 조건이 충족되면 즉시 지급, 아니면 무지급이다. UST 커버의 경우 TWAP 가격 조건이 충족되자 자동으로 보험금이 지급될 정도로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작동했다.
- Unslashed: 제3자 평가자와 중재(arbitration) 옵션이 있는 반(半)탈중앙 구조다.
- Sherlock: 팀이 중심이 되어 결정을 내리는 보다 중앙화된 모델이다.
- 토크노믹스: 대부분의 프로토콜이 거버넌스와 경제적 인센티브를 겸하는 토큰을 발행한다.
- NXM(Nexus): 조합 거버넌스 참여에 사용되며, 상호공제조합의 자본 규모에 따라 가격이 동적으로 산정된다. 조합원만 보유할 수 있고 외부 자유 거래가 제한되며, 별도의 래핑 토큰이 존재하지만 내재가치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 INSUR(InsurAce): 보상 및 의결권에 쓰이는 일반 ERC-20 토큰으로,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된다.
- Risk Harbor: 초기에는 토큰 없이(혹은 토큰 비중을 크게 두지 않는 형태로) 출발해, 스마트 컨트랙트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추후 플랫폼 파라미터 거버넌스를 위해 토큰을 도입할 수 있지만, 클레임 결정은 토큰 투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기 보험 토큰 상당수는 상장 직후 과열 이후 가격 조정을 겪었다. 보험 비즈니스가 본질적으로 완만하게 성장하는 산업인 만큼, NXM과 INSUR 등도 높은 변동성을 보였다. 토크노믹스 설계에는 언더라이터(자본 제공자)에게 토큰 보상을 지급해 자금을 풀에 고정시키는 구조가 포함되는데, 실질적인 보험료 수입 증가 없이 토큰 인플레이션만 늘면 가격에는 부담 요인으로 작용한다.
- 신뢰와 투명성: 탈중앙 플랫폼들은 통상 커버 대상 프로토콜 목록, 가용 캐퍼시티(수용 한도), 온체인 재무 데이터와 클레임 이력을 비교적 상세히 공개한다. 이는 전통 보험사에서는 보기 어려운 수준의 투명성이다. 이용자는 언제든지 풀 규모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신뢰는 정당한 클레임을 실제로 지급해왔는지에 따라 축적되며, Nexus와 InsurAce는 일정 수준의 지급 실적을 통해 신뢰를 쌓는 한편, 이해 상충(토큰 보유자가 직접 클레임을 투표로 결정하는 구조)에 대한 회의론도 공존한다. Risk Harbor처럼 의사결정을 자동화한 플랫폼은 ‘사람을 믿을 필요는 없지만, 대신 수식과 오라클이 설계한 시나리오를 충분히 커버하는지’에 대한 신뢰가 중요해진다.
또 하나의 역설은 스마트 컨트랙트 자체의 리스크다. 보험 프로토콜의 컨트랙트가 해킹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20년 말 Cover Protocol이라는 별도의 보험 DAO가 실제로 해킹 피해를 입고 붕괴된 사건은, 디파이 보험사 자체의 보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킨다. 지금까지 Nexus, InsurAce, Risk Harbor는 직접적인 해킹 피해를 겪지 않았지만, 이용자 입장에서는 이런 리스크도 감안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일부 투자자는 여전히 ‘규제받는 전통 보험사 + 법적 구속력 있는 계약’을, 잠재적으로 버그로 전액 소진될 수 있는 디파이 보험보다 선호하기도 한다. - 규제·멤버십 구조: Nexus를 제외한 대부분의 탈중앙 보험 프로토콜은 KYC를 요구하지 않고 글로벌 오픈 액세스를 지향한다(다만 일부 지역 이용자는 법적 리스크를 고려해 스스로 참여를 자제할 수 있다). Nexus Mutual은 영국 상호공제조합이라는 법적 껍데기를 선택해 규제상 안전판을 확보하는 대신 KYC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일부 디파이 순수주의자들에겐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다른 프로토콜들은 전형적인 디파이 프로젝트처럼 운영되며, 향후 “보험 라이선스 없이 사실상 보험을 판매하는 것 아니냐”는 규제 논쟁에 휘말릴 여지가 있다. 이들은 주로 ‘insurance(보험)’가 아니라 ‘cover(커버)’ 혹은 상호 보호 상품이라고 주장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감독 당국의 시각이 바뀔 수 있다.
실제론 많은 크립토 이용자들이 이러한 디파이 보험 상품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른다. 반면 디파이에 깊이 관여한 투자자들은 점차 전략의 일부로 커버 구매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레버리지를 활용한 이자 농사(일드 파밍) 투자자나 DAO 재무금고는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헤지 수단으로 보험을 적극 검토하는 분위기다.
눈에 띄는 변화는 ‘탑재형(임베디드)’ 구조다. 예를 들어 Nexus Mutual의 커버는 이제 Yearn 앱 인터페이스나 Armor 같은 애그리게이터를 통해 바로 구매할 수 있으며, Armor는 Nexus 커버를 소액·단위 상품으로 재구성해 접근성을 높이려 했다. 또 OpenCover의 Base DeFi Pass처럼, 베이스(Base) 네트워크 내 여러 프로토콜을 한 번에 묶어 커버해주는 패스 상품에 Nexus 커버를 포함시키는 식의 구조도 등장했다. 이처럼 디파이 보험을 사용자의 실제 이용 동선 속에 녹여, 프로토콜을 사용하면서 거의 ‘원클릭’으로 커버를 붙이게 하는 흐름은 앞으로 더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화(전통) 보험 vs 탈중앙 보험을 비교하면 장단이 뚜렷하다. 중앙화 보험은 법적 집행력이 뒷받침되는 정식 보험 계약을 제공하며, 이론적으로는 보험금 미지급 시 소송도 가능하다(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지만). 탈중앙 커버는 조합 또는 커뮤니티 차원의 약속에 가깝다. 대신 파라메트릭 상품의 경우 특히 지급 속도가 매우 빠를 수 있고, 전통 보험사가 다루지 않는 최신 디파이 리스크(특정 유형의 스마트 컨트랙트 익스플로잇 등)를 선제적으로 커버할 수 있다.
지급 통화 측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디파이 보험은 보통 온체인 손실을 암호화폐로 바로 보상해주지만, 로이즈 같은 전통 보험은 기본적으로 법정통화 기준으로 지급한다(일부는 크립토 손실을 크립토로 지급하는 옵션을 검토 중이지만, 결국 환산·정산 절차가 필요하다). 재무적 건전성 측면에서는 엄격한 자본규제와 재보험 구조를 갖춘 대형 보험사 혹은 로이즈 신디케이트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인식을 준다. 반대로 디파이 상호조합의 풀은 여러 프로토콜이 동시에 해킹당하는 시스템 리스크 상황에서 자본이 고갈될 수 있다. Nexus처럼 스테이킹 구조와 부분 지급 설계를 통해 동시다발 클레임 리스크를 완화하려 하지만, 거시적인 시스템 충격 앞에서는 어느 보험사든 한계가 있다.
흥미로운 하이브리드 구상으로는 디파이 보험 플랫폼에 전통 재보험이 ‘백스톱(backstop)’ 역할을 하는 모델이 거론된다. 아직 구체적인 사례는 드물지만, 향후 예를 들어 대형 재보험사가 “디파이 상호조합의 손실이 일정 한도를 넘을 경우 초과분을 보전하는” 구조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온체인 분배의 효율성과, 거대 재보험사의 두터운 자본력이 결합한 형태가 구현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크립토 보험 시장은 한쪽 끝에는 로이즈 런던 마켓에서 디지털 자산 리스크를 논의하는 언더라이터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토큰 홀더들이 온체인 투표로 클레임을 결정하는 DAO가 공존하는 다층적 구조다. 각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다. 로이즈는 ‘보험 불가’로 여겨졌던 리스크를 수세기 동안 인수해 온 경험과 규율을 갖고 있고, Nexus Mutual 같은 디파이 네이티브 프로젝트는 전통 계리사가 따라오기 어려운 속도로 스마트 컨트랙트 리스크를 분석·가격해낸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제공자의 신뢰도와 수용능력(capacity)을 꼼꼼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거 실제로 얼마를 지급해 왔는지(클레임 이력은 신뢰와 직결된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보장 한도가 충분히 제공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또한 여기서도 ‘분산 투자’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규모 암호화폐 보유자는 콜드월렛 자산은 로이즈 언더라이팅 보험으로, 디파이 포지션은 Nexus Mutual 커버로 나누어 각각의 리스크 레이어를 다른 채널로 보호하는 식의 조합을 고려할 수 있다.
이제 공급자와 상품 구조를 살펴본 만큼, 다음은 이 시장을 규정하는 규제 환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보험은 규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산업이며, 각국의 법·제도가 어떤 커버 상품이 등장할 수 있는지, 나아가 일부 크립토 사업자에게는 보험 가입을 의무화할지까지 좌우한다.
미국·유럽·아시아 규제 프레임워크: 크립토 보험의 항로
크립토 보험 시장이 성장하면서, 각국 규제 당국은 보험 규제와 광의의 디지털자산 규제를 교차시키며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가고 있다. 특히 미국, 유럽(EU/영국), 아시아 주요국의 접근법은 글로벌 플레이어의 전략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경우, 연방 차원에서 ‘크립토 전용’ 보험 규제가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리스크 관리와 투자자 보호에 대한 당국의 관심은 뚜렷이 강화되고 있다. 미국 규제기관들은 암호화 자산이 은행 예금이나 증권계좌처럼 자동으로 공적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암호화폐를 직접 보장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천명했으며, 일부 크립토 기업이 마치 암호화폐 예치금이 FDIC 예금보험 대상인 것처럼 홍보하자 이를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대신, 어떤…미국: 민간 보험 중심 구조와 규제의 ‘우회 압박’
미국에서는 암호화폐 관련 위험은 사실상 민간 보험에 의존하고 있다. 공적 예금자 보호나 투자자 보호 체계와는 별개로, 개별 보험사가 설계한 특화 상품을 통해 리스크를 보장하는 구조다.
보험 규제 측면에서 주(州) 보험당국을 조율하는 NAIC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NAIC는 미국 내 보험사가 자산운용 포트폴리오에 암호화폐를 편입하는 것을 극히 제한하고 있는데, 변동성이 지나치게 크다는 이유에서다. 그 결과, 전통 보험사가 암호화폐 관련 리스크를 직접 인수할 여지가 좁아지고, 실질적인 암호화폐 보험은 미국 내에서 주로 이른바 초과·특별보험(excess & surplus lines) 시장을 통해 공급되고 있다. 버뮤다, 런던 등 역외에 기반을 둔 전문 보험사가 규제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환경에서 ‘비정형 리스크’를 대상으로 개별 보험을 설계·인수하는 방식이다.
뉴욕주처럼 BitLicense 제도를 통해 암호화폐 사업자를 직접 인가하는 주는 사실상 보험 가입을 ‘권고에 가까운 기준’으로 삼고 있다. 뉴욕금융서비스국(NYDFS)은 BitLicense 보유 업체에게 고객 자산 손실에 대비한 신용보증(fidelity bond) 또는 보험을 유지할 것을 가이드라인에 명시했고, 실제로 상당수 라이선스 보유사가 수탁 자산에 대한 보험을 확보해 왔다. NYDFS가 코인베이스(Coinbase) 등 대형 사업자에게 인가를 내줄 때도, 수탁 자산에 대한 보험 구조를 중요한 심사 요소로 언급한 바 있다.
연방 차원에서도 규제 문구 안에 ‘보험 여부’가 점차 들어가기 시작했다. SEC는 브로커딜러 및 투자자문사의 암호화폐 수탁 규정에서, 수탁기관이 디지털 자산 손실을 보장하는 보험을 보유하고 있는지 공시할 것을 요구했다. 비트코인 선물 ETF를 처음 승인할 당시에도, SEC는 펀드 투자설명서에 “암호화폐는 주식처럼 SIPC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경고 문구와 함께, 수탁기관이나 펀드가 별도로 가입한 민간 보험의 존재와 범위를 명확히 기재하도록 의무화했다. 규제 당국이 보험 가입을 직접 명령하기보다는, ‘안전망 유무를 투자자에게 투명하게 밝히라’는 방식으로 시장 압력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금융 규제 당국은 보험 부재를 점차 ‘시스템 리스크’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2021년 대통령 금융시장 실무그룹(PWG)의 스테이블코인 보고서는 대규모 환매(run)를 막기 위해 예금자 보호와 유사한 수준의 보호장치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사실상 준비금에 대한 보험 또는 명시적 보증 체계를 시사했다. 아직 구체적 제도는 마련되지 않았지만, 스테이블코인과 일부 암호화폐 활동을 규율하는 “Genius Act” 등 입법 논의가 이어지면서, 준비금 보험 의무화나 강화된 공시 요건이 포함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주(州) 단위 규제는 지역별로 편차가 크다. 일부 주는 암호화폐를 다루는 머니트랜스미터(송금업자)에게 보증채(surety bond)나 보험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로드아일랜드의 ‘디지털 자산 비즈니스법’은 라이선스 보유자가 고객 보호를 위한 보증채 또는 신탁계좌를 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 보험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특수목적예금기관(SPDI)이라는 암호화폐 특화 은행 인가를 도입한 와이오밍주는, 이들 기관이 안전성과 건전성 감독의 일환으로 특정 운영리스크에 대한 보험을 의무적으로 확보하도록 요구한다.
요약하면, 미국에서는 “보험 공백을 포함한 리스크 노출의 불확실성”이 기관 투자자의 본격 진입을 가로막는 핵심 장애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국은 직접적인 보험 의무화 대신, 암호화폐 사업자에게 보험 가입을 유도하고 최소한 보험 보유 여부와 범위를 공개하도록 압박하는 중간 단계에 있다. 2024~2025년으로 예상되는 암호화폐 포괄 입법이 진행되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게 준비금 보험 또는 동등한 보호장치를 요구하거나, 거래소에 핫월렛 자산의 일정 비율 이상을 보험으로 커버하도록 규정하는 등 보다 명시적인 보험 요건이 등장할 수 있다.
또한 토큰 일부를 증권 또는 상품으로 명확히 분류해 규칙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법적 지위가 정리될 경우, 보험사는 규제 환경이 ‘가시권’에 들어온다고 보고 언더라이팅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여지가 커진다. 실제로 2024년 말 SEC·CFTC가 강경 규제 드라이브를 다소 완화하고 입법을 지켜보는 국면으로 전환한 점은, 업계에서는 암호화폐 비즈니스와 그에 연동된 보험 시장 모두에 ‘순풍’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명확한 ‘룰 오브 더 로드’가 보험사의 참여 문턱을 낮추는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영국: MiCA를 축으로 한 규율과 민간 보험의 병행
유럽연합은 2023년 통과된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정을 통해 세계 최초의 포괄적 암호자산 법제를 마련했다. MiCA는 암호자산 발행자, 거래소·지갑 등 암호자산 서비스 제공자(CASP), 스테이블코인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MiCA가 포괄적인 ‘보험 의무화’까지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건전성 규제와 리스크 공시를 대폭 강화하면서 ‘보험 또는 이에 준하는 보상장치’를 사실상 옵션으로 올려놓았다. 예를 들어 CASP는 고객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절차를 갖춰야 하며, 특히 수탁(custody)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인가 심사 과정에서 보험 또는 동등한 보상 메커니즘을 요구받을 수 있다. 구체적인 수준과 형태는 회원국별 감독당국이 정하지만, MiCA는 “보험 또는 보상장치가 포함된 리스크 관리 체계”를 암묵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일부 국가들은 이미 MiCA 이전부터 자국 규제를 통해 유사한 틀을 구축했다. 독일의 경우 금융감독청(BaFin)이 암호화폐 수탁업 인가를 내주면서 일정 수준의 자기자본을 요구하고, 법적 의무는 아니더라도 보험 또는 보증을 확보하는 것을 업계 ‘모범 규범’으로 간주해 왔다. 프랑스도 금융시장청(AMF)이 도입한 선택적 라이선스 제도를 통해 일정 경우 전문 직업배상책임보험 가입을 권고했다.
MiCA에서 명시적인 대목은 자산연동토큰(스테이블코인 등)을 발행하는 사업자에 대한 공시 요건이다. 이들은 발행 백서(whitepaper)에 리스크 요인과 면책사항을 담으면서, EU 예금보호 제도가 해당 자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다시 말해, 은행 예금과 같은 공적 보장 장치는 없으며, 발행자가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보험이 없는 한 투자자는 손실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도록 한 것이다. 전통 금융에서 일부 투자 서비스가 투자자보상제도의 보호를 받는 것과 달리, 암호자산은 별도 분류로 남아 있기 때문에, 향후 증권 재분류 등의 추가 입법이 없는 한 민간 보험 외에는 보호 수단이 없다. MiCA는 이 공백을 공시를 통해 투명하게 드러내면서, 역설적으로 사업자에게 “고객 신뢰를 위해 민간 보험을 도입하라”는 시장 압력을 형성하고 있다.
EU를 떠난 영국도 유사한 궤적에서 별도 제도를 다듬고 있다. 2023년 제정된 금융서비스·시장법(Financial Services and Markets Act 2023)은 스테이블코인 결제 등 일부 암호자산 활동을 규제 범위 안으로 공식 편입했다. 금융행위감독청(FCA)은 암호자산 홍보 및 영업 행위 규칙을 잇달아 자문에 부치면서, 보험 의무를 직접 들이대기보다는 소비자 보호와 리스크 경고에 방점을 찍고 있다.
예컨대 FCA는 암호화폐 관련 광고에 “귀하는 금융서비스보상제도(FSCS)나 금융옴부즈맨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식의 경고문을 포함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FSCS는 영국판 예금자·투자자 보호기구지만, 암호자산 손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향후 영국이 MiCA 유사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대형 거래소 등에 일정 수준의 보험 또는 자본 완충 장치를 요구하는 방안이 소비자 보호 논의의 일부로 떠오를 공산이 크다.
런던이 글로벌 보험 허브라는 점도 변수다. 영국 당국은 이미 암호화폐 보험의 런던 시장 내 전개 상황을 상당 부분 파악하고 있으며, 로이즈 오브 런던(Lloyd’s)은 영란은행 및 규제당국과 디지털 자산 이슈를 긴밀히 논의해 왔다. 로이즈 언더라이터인 아치(Arch)의 제임스 크룸(James Croome)은 “시장 채택 확대와 규제 요건의 정교화가 런던에서 암호화폐 보험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디지털 자산 거래·수탁을 규율하는 규제가 보다 정교하고 폭넓게 설계되면서, 보험사가 이를 언더라이팅 기준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콜드월렛 비중, 감사 기준 등 ‘규칙’이 구체화될수록, 보험사는 이를 전제로 보장 한도·면책 조건을 세밀하게 설계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커버리지 공급이 확대되는 구조다.
아시아: 홍콩·싱가포르 등 허브의 상반된 접근
아시아는 각국이 서로 다른 규제 철학을 보이며 ‘모자이크’에 가깝지만, 홍콩·싱가포르·UAE(중동이지만 광의의 아시아 금융 허브), 일본이 비교적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홍콩은 최근 몇 년 사이 정책 방향을 선회해, 다시 한 번 암호화폐 친화 허브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증권선물위원회(SFC)는 2023년 6월부터 가상자산거래플랫폼(VATP)에 대한 신규 인가 체계를 시행했고, 이 과정에서 보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인가를 받은 거래소는 고객 자산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보험으로 커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SFC는 감독 대상 거래소에 핫월렛과 콜드월렛 모두에 대해 보험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면서, 사실상 핫월렛 해킹·절취 리스크를 겨냥한 범죄보험 가입을 명문화했다. 아울러 고객 자산의 최소 98%를 콜드월렛에 보관하도록 하고, 콜드 자산의 약 50%, 소수에 불과한 핫 자산은 사실상 100%에 가까운 수준을 보험으로 담보하는 것을 기대했다. 요건이 워낙 엄격하다 보니, 업계는 특히 핫 자산 부분에서 적정 한도로 인수에 나서는 보험사를 찾기 어려웠고, SFC도 이를 인지한 뒤 최근 기준 완화를 시사했다.
홍콩 당국은 98% 콜드월렛 의무 규정을 완화하고, “보험 기준을 글로벌 관행과 정렬하겠다”고 언급했다. 절대적인 비율을 고집하기보다, 거래소가 자체 리스크 구조에 맞춰 충분한 보험 또는 자본 완충을 확보했음을 입증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이 세계에서 손꼽히게 ‘법으로 암호화폐 보험을 의무화한’ 관할권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여기에, 점차 더 많은 암호화폐 기업이 상장을 추진하거나 전통 금융과의 통합을 모색함에 따라, 이사회와 경영진을 겨냥한 D&O(임원배상책임) 보험 수요도 커지고 있다. 홍콩 규제당국은 암호화폐 기업의 책임 리스크 관리에서도 보험이 축을 담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
싱가포르는 또 다른 형태의 암호화폐 허브다. 싱가포르통화청(MAS)은 2023년 규정을 강화해 디지털 결제 토큰 서비스 사업자에게 고객 자산의 분리 보관을 의무화하고, 최소 90%를 콜드월렛에 두도록 요구했다. 다만 MAS는 여기서 한 발 물러서, 홍콩처럼 보험을 직접 의무화하는 선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보험 가입을 의무화해 자산을 보호하기보다는, 자산의 대부분을 오프라인(콜드월릿)으로 옮기고(그리고 고위험 이자 농사 등에 쓰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애초에 손실 발생 가능성을 낮추는 쪽을 택한 셈이다. MAS는 한때 고객 자산에 대해 보험 가입이나 신탁계좌 내 ‘완충 자산(cushion)’ 적립을 의무화할지 자문을 구했지만, 결국 자산 분리보관과 ‘자산 유지 요건(asset maintenance requirement)’으로 방향을 잡았다. 즉, 라이선스 업체가 일정 수준의 유동자산 버퍼를 자체적으로 보유하도록 한 것이다.
다만 규정에는 “보험 부재”와 “분리보관을 하더라도 파산 시 고객이 완전히 보호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고객에게 명시적으로 고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 내 다수의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고객 신뢰 제고를 위해 전체 자산의 약 10%인 핫월릿 부분에 대해서라도 자발적으로 보험을 드는 추세다. 실제로 싱가포르에 기반을 둔 여러 거래소들이 보험 계약 체결을 발표했으며, 대표적으로 싱가포르 본사인 크립토닷컴(Crypto.com)은 콜드월릿 자산에 대해 7억5,000만 달러 규모의 보험을 확보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바 있다. 이는 사실상 글로벌 사업 전반을 커버하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종합하면 MAS의 입장은 “예방 규제”에 무게를 두고 있다. 콜드스토리지·내부 통제 강화로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도록 강제하고, 보험은 민간 차원의 보완적 수단으로 남겨두는 방식이다. FTX 붕괴와 같은 사태 이후 MAS는 투자위험 경고에도 특히 적극적이다. 싱가포르에서는 가상자산 광고에 “투자 원금을 전부 잃을 수 있다” 수준의 강한 리스크 문구를 넣도록 의무화하고 있는데, 이 같은 투명성이 역으로 “하지만 우리 회사는 최대 ○○까지 보험에 가입해 이 같은 위험의 일부를 완화하고 있다”는 식의 차별화 전략을 유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UAE, 특히 두바이의 VARA(가상자산 규제당국·Virtual Assets Regulatory Authority)는 가상자산 규제 프레임워크 안에 ‘보험’을 가장 적극적으로 녹여 넣은 사례로 꼽힌다. VARA의 규정에 따르면, 두바이에서 인가를 받으려는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업자(VASP) — 거래소·수탁기관 등 — 는 일정 수준의 보험 프로그램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VARA는 해킹·도난·내부 사기 등으로부터의 손실을 보전하는 수탁(custody) 관련 보험을 필수로 요구하고, 여기에 더해 필요 시 전문직 배상책임보험(Professional Indemnity)과 임원배상책임보험(D&O) 등도 요구한다. 사실상 두바이에서 라이선스를 받으려는 모든 가상자산 사업자는 VARA의 승인을 받을 만한 ‘보험 패키지’를 제시해야 하는 구조다.
UAE 중앙은행 역시 디지털 자산 수탁 리스크 보험(digital asset custodial risk insurance)의 필요성을 원칙적으로 지지해 왔다. 그 결과, 현지에서는 수요에 맞춘 ‘맞춤형(베스포크) 가상자산 보험’을 공급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당국자들은 수백 개의 스타트업이 라이선스를 신청하면서 “맞춤형 암호화폐 보험에 대한 긴급한 수요”가 발생했다고 평가한다. 보험을 규제의 일부로 ‘박아 넣음’으로써, UAE는 “우리 관할 내 라이선스 사업자는 보험 가입이 필수이므로 기관투자자의 자금이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다”는 메시지를 내세우며 기관 자금 유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모습이다.
향후 VARA는 최저 보장 한도, 인정 가능한 보험사 요건 등 세부사항을 계속 다듬어 나갈 것으로 보이지만, 방향성은 분명하다. 보험이 두바이 가상자산 규제 전략의 핵심 축이라는 점이다.
- 일본:
일본은 2014년 마운트곡스(Mt. Gox) 사태 이후 2017년에 세계 최초 수준의 암호화폐 거래소 라이선스 제도를 도입한 국가다. 당시 일본 규제당국은 거래소에 대해 일정 수준의 보안 체계를 갖출 것과, 도난 등으로 인한 고객 암호자산 손실이 발생할 경우 고객에게 배상할 의무를 부과했다. 이는 사실상 거래소가 ‘자기부담 준비금’을 쌓거나, 민간 보험을 통해 리스크를 전가하도록 강제한 셈이었다.
일부 일본 거래소는 실제 보험에 가입했다. 예컨대 미쓰이 스미토모 해상(Mitsui Sumitomo Insurance)은 2019년 일본 내 거래소를 대상으로 최대 1,000만 달러 손실을 보장하는 보험 상품을 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8년 코인체크(Coincheck)에서 5억3,000만 달러 상당의 NEM이 유출된 사건 이후, 일본 규제당국은 보안 요구 수준을 대폭 상향했다. 코인체크를 인수한 기업은 자체적으로 가입해 둔 보험으로 일부 손실을 충당했고, 나머지는 내부 자금으로 전액 고객에게 보상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일본에는 “암호화폐 거래소는 반드시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식의 명시적 법 조항은 없다. 그러나 실제 규제 운영에서는 거래소가 고객 손실을 전액 보전할 것을 강하게 기대하고 있어, 사실상 충분한 자기자본 혹은 보험 중 하나를 갖출 수밖에 없는 구조다. 추가로 일본은 거래소가 고객 자산 대비 일정 비율의 준비금을 유지하도록 법으로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암호자산 손실에 대비해 법정화폐 준비금을 더 많이 쌓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일종의 ‘준(準)보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 기타 아시아 및 호주:
한국의 경우, 2021년 일부 중소 거래소 사태 이후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최소 수준의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발의된 바 있다. 당시 논의된 안은 약 30억 원(미화 약 250만 달러) 수준의 최소 보장 한도를 제시했는데, 대형 해킹 사례를 감안하면 크지 않은 금액이다. 해당 법안의 최종 통과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업비트·빗썸 등 주요 거래소들이 일정 규모의 보험(대개 수백만 달러 수준으로, 보유 자산 대비로는 상징적 수준)에 가입해 있는 것은 알려져 있다.
호주 역시 WTW 보고서에서 살펴본 대로, 본격적인 가상자산 규제체계 구축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정부의 규제안에 따르면, 가상자산 거래소와 수탁기관을 기존 금융서비스 사업자와 유사하게 취급하며, 이 경우 다른 금융업자와 마찬가지로 전문직 배상책임보험(Professional Indemnity Insurance) 요건을 충족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호주에서는 재무설계사·브로커·거래소 등 금융서비스 제공자는 법에 따라 PI 보험을 갖춰야 하므로, 규제체계 전환이 완료되면 가상자산 사업자에게도 사실상의 ‘최소한의 의무 보험’이 부과될 공산이 크다.
각국 규제당국은 또 다른 축으로 ‘위험 고지’에 집중하고 있다. 전통 금융과 달리 가상자산에는 예금보험이나 정부 지급보증이 없다는 점을 소비자에게 명확히 알리라는 요구다. EU, 영국, 미국, 싱가포르, 홍콩 등은 이미 도입했거나 도입을 예고한 규정을 통해, 가상자산 광고와 고객 온보딩 자료에 “은행 예금보험 대상이 아니다”, “정부 보증이 없다”는 문구를 넣도록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정적이지만, 이로 인해 진지한 사업자들은 “다만, 우리 회사는 민간 보험을 통해 ○○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는 식으로 차별화를 꾀하게 된다. 규제가 소비자에게 ‘내가 쓰는 거래소가 보험에 가입했는지, 보장 규모와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묻게 만드는 셈이고, 이는 업계 전체에 더 높은 투명성과 보험 가입 확대를 사실상 압박하는 간접 규율 효과를 낳는다.
정리하면, 각국 규제체계는 가상자산 리스크 관리에 대한 ‘비계(scaffolding)’를 조금씩 구축해 가고 있다. 홍콩·UAE처럼 라이선스 조건에 보험을 아예 박아 넣는 곳도 있는 반면, 미국·EU는 우선 명확한 공시와 건전한 리스크 관리 관행을 유도하며, 향후 입법 진전에 따라 의무화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이러한 움직임은 가상자산 보험 시장에는 직접적인 수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규제 준수를 위해 거래소가 자산 분리, 손실 대비 계획을 마련해야 하는 순간, 보험사는 그 계획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규제 목표와 실제 시장 수용력 간 균형이다. 홍콩 사례에서 보듯, 현실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상품(예: 핫월릿 100% 보장)을 의무화하면 산업 자체가 멈춰 설 수 있어, 결국 규정을 완화·조정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공통 규범이 자리잡으면서, 업계 협회나 정부 주도의 상호부조 풀(Mutual Insurance Pool)이 등장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일부 관할에서는 “거래소 기본예탁금·디폴트 펀드”를 업계 분담금으로 조성해, 사고 발생 시 공동 보상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다만 그 전까지는 각 회사가 민간 보험을 자체적으로 조달하고, 각국 규제당국이 이를 어느 수준까지 강제 또는 유도할지 결정하는 구조가 이어질 전망이다.
이처럼 규제환경을 살펴보면, 가상자산 보험 시장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준법 요구·공시 규칙·소비자 보호 강화 기조와 긴밀히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제도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가상자산 보험이 직면한 고유 과제들 — 자본 비효율성, 오라클 조작 위험, 거버넌스 문제, 재보험 한계 등 — 을 짚어본다.
가상자산 보험 시장의 과제들
가상자산 보험은 짧은 기간 동안 큰 진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전통 보험과 구분되는 구조적 장벽을 안고 있다. 일부는 가상자산 산업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되고, 일부는 신생 시장인 가상자산 보험의 미성숙에서 기인한다. 주요 이슈로는 자본 비효율성, 오라클(Oracle) 조작 리스크, 거버넌스 난제, 재보험 인프라 부족 등을 꼽을 수 있다.
1. 자본 비효율성
보험의 본질은 ‘위험 풀링(pooling)’이다. 여러 가입자로부터 보험료를 모은 뒤, 일부에게 발생한 손실만을 보상함으로써 전체 자본 효율을 끌어올린다. 이때 이상적인 보험 풀은, 보장액 1달러당 준비금 1달러를 1:1로 쌓지 않는다. 모든 피보험 자산이 동시에 전부 손실되는 극단 상황은 매우 드물다는 전제 아래, 통계·다변화(포트폴리오 분산)·재보험을 활용해 훨씬 낮은 자본 비율로도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전통 보험의 모델이다.
반면 가상자산 보험, 특히 탈중앙화 구조의 프로토콜은 지금까지 자본이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으로’ 묶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 암호화폐 상호공제(Mutual) 모델은 사실상 100%에 가까운 완전담보(fully funded)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넥서스 뮤추얼(Nexus Mutual)이 1,000만 달러어치의 보장(커버)을 판매하려면, 손실 가능성에 대한 장기 통계가 부족한 탓에 보수적으로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풀에 쌓아두어야 했다. 이로 인해 보험료(프리미엄)는 보장 한도에 비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커버 판매 규모는 유입 자본 규모에 의해 제약받았다.
자본 비효율성은 자산 가격 변동성에서도 발생한다. 풀 자본이 ETH 등 시가 변동성이 큰 자산으로 구성될 경우, 시장 하락으로 ETH 가격이 50% 떨어지는 순간, 동일한 명목 보장액 기준으로 보면 풀의 자본적정성이 순식간에 악화된다. 넥서스의 채권곡선(bonding curve) 메커니즘은 토큰 가격을 조정해 자본 부족 시 신규 커버 판매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이를 완충하지만, 여전히 미세 조정이 필요한 ‘줄타기’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몇 가지 혁신이 시도되고 있다. 리스크 하버(Risk Harbor) 같은 모델은 언더라이팅(인수) 자본이 단순히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범위 내에서 수익을 창출하도록 설계해 자본 효율성을 높이려 한다. 예컨대 언더라이터가 예치한 자본을, 청구 발생 가능성이 낮은 구간에서는 Aave 등 디파이 프로토콜에 예치해 이자를 얻도록 하되, 사고 발생 시에는 즉시 보험금 지급에 동원하는 식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전액 보상이 아닌 ‘부분 보상’ 구조, 혹은 파라메트릭(parametric) 방식의 적용이다. 예를 들어 손실액의 100% 대신 90%만 보상하도록 설계하면, 풀 전체의 최대 노출액이 줄어들어 필요한 준비금이 낮아지고, 리스크 예측도 한층 용이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과제는 ‘가상자산 리스크의 규모에 비해 투입된 보험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현재 전 세계 가상자산 공급량 가운데 실제로 보험에 의해 커버되고 있는 비중은 대략 1~2% 수준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보험사가 여전히 가상자산 리스크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기에는 아직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다. 한 업계 보고서가 지적했듯이 “손해율 통계도, 업계 표준도 없는 상태라 현재 상품들은 사실상 전부 맞춤형… 보장 구조도 복잡하다” 보니, 인수인들은 안전을 위해 과도한 자기자본과 높은 보험료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 손실 이력이 쌓이면 가격 산출 모델이 정교해지고, 자본 효율성도 개선될 것이다. 사이버 보험이 초기에는 매우 비싸게 시작했다가 시간이 흐르며 보험사들이 점차 최적화에 성공한 흐름과 유사하다.
자본 조달 측면에서도 구조적 차이가 있다. 크립토 보험 뮤추얼은 주로 커뮤니티 참여자의 스테이킹 자본에 의존하는데, 이들은 다른 디파이 투자·일드 파밍 기회를 포기하는 만큼 매우 높은 수익률을 기대한다. 반면 전통 보험사는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낮은 한 자릿수 수익률에도 만족하는 대규모 장기 자금을 끌어올 수 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쉽지 않다. 한 가지 유망한 흐름은 크립토 리스크를 보험연계증권(ILS) 형태로 구조화하는 시도다. 크립토 관련 보험 리스크를 채권 유사 상품으로 포장해 연기금이나 ILS 펀드가 투자할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이다. 사이버 리스크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ILS 구조가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크립토 해킹 리스크에도 유사한 구조가 등장할 수 있다는 논의가 초기 단계에서 이뤄지고 있다. 검색 결과 요약에서 언급된 것처럼 ILS 구조로 최대 5억 달러 규모까지 가능하다는 언급이 나왔다는 점은 투자자의 관심을 시사한다.
이처럼 ILS나 재보험을 통해 크립토 리스크를 외부 전문 투자자에게 “감내 가능한 자산군”으로 포장해 전달할 수 있게 되면, 이 부문으로 유입되는 자본이 크게 늘고 효율성도 비약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디파이 보험사가 더 이상 크립토 고래의 자산을 과잉 담보로 잡아둘 필요 없이, 일부 리스크를 전문 시장으로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자본 비효율 때문에 보험료가 높게 형성된다. 대형 보장의 경우 연간 보험료가 피보험금액의 2~5% 수준에 이르는데, 이는 전통 금융권의 유사 담보 대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정교한 리스크 모델링과 외부 자본 유치로 이 비효율을 줄이는 것이 향후 핵심 과제다.
오라클·데이터 신뢰성 리스크
특히 파라메트릭(지수형) 구조가 많은 크립토 보험은 오라클과 데이터 피드 의존도 때문에 특유의 조작·장애 리스크를 안고 있다. 클레임 지급 여부를 온체인 오라클에 연동할 경우, 악의적 행위자가 그 오라클을 겨냥해 조작을 시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토큰 가격이 0.50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보험금이 지급된다”는 상품이 있다고 치자. 이 상품에 가입한 공격자가 플래시 론과 유동성이 얕은 거래소를 활용해, 짧은 순간 동안만 오라클에 보고되는 가격을 0.50달러 미만으로 떨어뜨려 트리거를 작동시키고 보험금을 챙기는 식이다.
이 같은 오라클 조작 공격은 디파이 전반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2022년 한 해에만 최소 41건의 오라클 조작 공격으로 4억 달러 이상이 탈취됐다. 아직까지 “보험”만을 정조준한 공격 사례는 공개적으로 보고된 바 없지만(풀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모든 공격자가 보험을 주요 타깃으로 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위협 자체는 분명하다. 파라메트릭 보험의 품질은 데이터의 품질만큼만 담보된다. 데이터 소스가 공격 가능하거나 단순 장애에 취약하다면, 잘못된 지급이나 정작 필요한 시점에 미지급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크립토 보험사들은 오라클 선정에 매우 신중하다. 순간 가격이 아닌 일정 기간의 시계열을 반영하는 시간가중평균가격(TWAP)을 활용해 단기 스푸핑을 어렵게 만들고, 여러 거래소 가격을 집계하는 체인링크 같은 검증된 오라클을 선호한다. 일부는 오라클 트리거와 함께 사람의 검증 절차를 병행한다. 예를 들어, DAO가 조작 의심이 있을 경우 지급을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갖도록 설계하는 식이다. 리스크 하버는 아예 외부 가격 오라클을 쓰지 않고, 콤파운드의 cToken 교환비율처럼 프로토콜 상태 값을 직접 트리거로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물론 이 역시 프로토콜 자체가 공격받으면 왜곡될 수 있지만, 외부 가격 피드 조작 리스크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오라클 리스크는 여전히 큰 과제다. 보험을 자동화·탈중앙화할수록, 곧바로 손댈 수 없는 데이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그 데이터가 오염될 여지도 커진다. 반대로, 조작 여부를 사람이 판별하도록 개입시키면 다시 신뢰·중앙화 문제가 불거진다. 두 극단 사이의 균형점 찾기가 쉽지 않다.
악의적 조작이 아니더라도 데이터 가용성 문제는 남는다. 크립토 시장은 24시간 365일 글로벌로 돌아가지만, 보험사가 의존하는 API나 오라클은 다운타임을 겪을 수 있다. 만약 손실 발생을 입증해야 하는 시점에 오라클이 멈춰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통 보험은 사후 조사로 사실관계를 확인할 여지가 크지만, 온체인 파라메트릭 보험은 계약 단계에서부터 백업 데이터 소스나 예외 처리 조항을 명시하지 않으면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일반 사용자는 이런 기술적 세부사항을 깊이 따지지 않더라도, 보험 프로토콜을 설계하는 개발자들에게는 핵심 변수다.
거버넌스·클레임 분쟁 리스크
탈중앙 보험에서 거버넌스 문제는 신뢰를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다. 앞서 언급했듯 조합원·토큰 홀더 기반 플랫폼은 구조적으로 이해 상충을 안고 있다. 토큰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정당한 청구까지도 부당하게 거절하려는 유인이 생길 수 있고, 이는 보험의 본질을 훼손한다. 지금까지 넥서스 뮤추얼 같은 주요 프로토콜은 “명백히 정당한” 것으로 여겨진 청구 대부분을 실제로 지급해 심각한 스캔들을 피했다. 그러나 언제든 논쟁적인 케이스는 발생할 수 있다.
테라 UST 붕괴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넥서스 뮤추얼은 약관상 UST 디페그(페깅 붕괴) 리스크를 포함하지 않고 있었기에 보장을 제공하지 않았고, 반면 인슈어에이스는 디페그를 명시적으로 담보하는 상품을 판매했기 때문에 지급에 나섰다. 시장 일각에서는 넥서스가 그런 상품을 애초에 내놓지 않은 점, 혹은 예외적으로라도 보장하지 않은 점을 비판했지만, 약관과 거버넌스 규칙 상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보장 범위 설정에 관한 거버넌스 문제다. 보장 범위를 넓히면 파산 리스크가 커지고, 너무 좁히면 사용자 보호가 미흡하거나 불만이 쌓인다.
클레임 처리 속도도 중요한 문제다. 디파이 이용자들은 “즉시성”에 익숙하다. 전통 보험에서는 복잡한 사고의 경우 조사와 서류 절차로 몇 주, 몇 달이 걸리는 것이 흔하다. 디파이 보험사들은 이를 단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슈어에이스는 UST 사태 관련 청구를 약 한 달 안에 정리했는데, 대형 재난으로서는 업계 평균보다 빠른 편이었다. 넥서스의 경우 온체인 투표 기간 등을 감안해 1~2주 정도 소요될 수 있다. 리스크 하버처럼 조건이 충족되면 이론상 즉시 자동 지급이 가능한 구조도 있지만, 가격 데이터 최종 확정까지는 몇 시간에서 며칠의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 거버넌스가 느리거나 자의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이용자는 보험 가입 자체를 꺼리게 된다. “정작 필요할 때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은” 상품에 보험료를 지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분쟁과 약관 해석 문제도 만만치 않다. 앞서 언급했듯 “해킹” 혹은 “익스플로잇”의 정의를 두고 이견이 생길 수 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UI) 버그로 인한 손실과 스마트컨트랙트 자체 버그로 인한 손실 중 어느 쪽까지만 보장하느냐, 위기 시 프로토콜이 예금 인출을 일시 중단해 자산은 지켜졌지만 일주일 동안 출금이 막힌 경우를 손실로 볼 것인가 등은 모두 미묘한 쟁점이다. 언슬래시드나 인슈어에이스 일부 상품처럼 “출금 중단(Withdrawal halt)”을 별도 담보 항목으로 넣는 사례도 있다.
전통 보험은 세세한 법률 문구와 사법부(법원)를 통해 이런 분쟁을 조정해왔지만, 탈중앙 보험은 코드와 커뮤니티 거버넌스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아직까지 디파이 보험사의 지급 거절을 두고 피보험자가 법정 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알려지지 않았다. 청구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이용자 상당수가 가명(익명)에 가깝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크립토 보험 시장이 커지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한 사용자가 특정 뮤추얼의 재단이나 운영 법인을 상대로 “절차가 불공정했고, 상품 설명이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며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이 올 수 있고, 이는 향후 판례를 만드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중앙집중형 크립토 보험사의 거버넌스 리스크는 또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면책 조항과 엄격한 보장 조건(워런티)을 붙여, 실제로는 지급을 피할 여지를 다수 남겨두는 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하려 들 수 있다. 일부 초기 크립토 보험 상품은 “블록체인 프로토콜 자체의 결함으로 인한 손실”을 전면 면책하거나, “내부자 도난이 법원 판결로 입증되지 않는 한 보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과도한 예외 규정을 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경우 보장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 되기 쉽다.
또한 많은 전통 보험 인수 인력은 초기에는 크립토·온체인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이는 리스크를 잘못 평가·가격화하게 만들며, 과도한 보험료 책정이나 애초 인수하면 안 될 리스크를 떠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크립토 전문 인수팀을 구성하는 보험사가 늘면서 이러한 문제는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추세다.
재보험·수용 능력(Capacity) 한계
크립토 보험 시장의 성장 여력은 재보험(보험사의 보험) 참여 여부에도 크게 좌우된다. 재보험은 1차 보험사가 손해액과 보험료를 일정 비율로 분담함으로써, 더 큰 보장 한도를 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다. 그러나 크립토 영역에서 재보험사의 참여는 지금까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충분한 손해 데이터가 없고, 규제 환경도 불투명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변화를 예고하는 조짐은 감지된다. 뮌헨리는 체인프루프(Chainproof)를 지원하며 이 분야에 발을 들였고, 아치는 에버타스(Evertas)의 대형 상품에 사실상 재보험·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일부 재보험사가 크립토 커스터디 리스크에 대해 조용히 공유 비례 재보험(쿼터셰어) 계약을 제공하고 있다는 업계 보고도 있다. 문제는 재보험사들이 ‘집중 리스크(aggregation risk)’를 특히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단일 사건이 다수의 보험 계약에 동시다발적인 손실을 안기는 시나리오다.
크립토에서는 메이저 블록체인 프로토콜의 근본적 취약점 노출이나, 급격한 시장 붕괴가 연쇄적인 시스템 실패를 불러올 수 있다. 이 경우 여러 거래소·디파이 프로토콜이 동시에 손해를 보게 되고, 보험사·재보험사 역시 상관관계가 높은 대규모 청구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통상 서로 독립적인 사건으로 간주되는 개별 주택 화재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사이버 보험 역시 랜섬웨어·멀웨어 한 번으로 다수 피보험자가 타격을 입을 수 있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고, 재보험사들은 보장 한도 제한과 데이터 축적을 통해 최악의 집단 손실 규모를 모델링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재보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각 보험사·뮤추얼은 자기자본 범위 안에서만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 넥서스 뮤추얼의 풀 규모가 제한적인 것도, 로이즈 신디케이트들이 개별 크립토 폴리시에 설정하는 최대 담보 한도가 낮은 것도 이러한 이유다. 반대로 재보험 시장이 열리면 수용 능력은 크게 확대될 수 있다.
최근 코인데스크가 언급한 ‘네이티브(Native)’ 같은 크립토 전문 보험 브로커의 등장은 이러한 전환의 전조로 읽힌다. 네이티브는 넥서스 뮤추얼 기반 MGA(Managing General Agent·보험 인수 대리점)로 운영되며, 동시에 전통 재보험 시장에서 리스크 분산을 모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는 디파이 뮤추얼과 전통 보험·재보험 자본을 잇는 하이브리드 구조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채널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으면 크립토 보험 섹터로 유입되는 자본 풀이 넓어지고, 단일 프로토콜이 떠안아야 하는 리스크 부담이 줄어들면서 전체 시장의 안정성과 효율성도 한층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기업이 하나의 보험 상품을 들되, 보장 한도의 50%는 온체인 풀인 넥서스(Nexus)가, 나머지 50%는 백엔드에서 전통 재보험사가 인수하는 구조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식의 블렌딩은 현재 디파이 보험 시장의 가장 큰 제약인 ‘수용여력(capacity) 부족’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다만 재보험사는 그 대가로 매우 정교한 리스크 평가를 요구할 것이고, 여기에는 크립토 해킹 확률 모델링, 프로토콜 보안 수준 평가 등 아직 성숙하지 않은 영역이 많다. 퀀트스탬프(Quantstamp)와 손해보험사 솜포(Sompo)의 제휴 사례는, 이러한 보안·리스크 전문성이 전통 보험 섹터로 어떻게 이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재보험과 관련된 또 다른 난제는 ‘표준화 부재’다. 현재 크립토 관련 보험 증권은 대부분 개별 프로젝트에 맞춘 주문형(bespoke) 구조에 가깝다. 이 때문에 리스크를 묶어서 패키징하고 2차 시장(재보험·ILS 등)으로 이전하기가 어렵다. 업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표준 약관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고, 로이즈(Lloyd’s)도 일부 디지털 자산 관련 표준 약관을 워딩 리포지터리에 올려두고 있다. 예컨대 복수의 보험사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표준 약관(Digital Asset Custody Policy)”이 널리 자리잡게 되면, 재보험사 입장에서는 해당 상품군 전체를 대상으로 포괄 재보험 조약(treaty)을 쓰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방향성은 이미 잡혀 있지만, 실제 산업 표준으로 안착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장 교육과 신뢰 구축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기술적·재무적 이슈를 넘어,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더 많은 크립토 보유자들에게 ‘보험을 들어야 할 이유’를 설득하는 일이다. 리테일 투자자 상당수는 이런 상품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거나, 비용 대비 효용이 크지 않다고 여긴다. 디파이에 대한 신념이 강한 이용자일수록 “코드를 신뢰하지, 넥서스 뮤추얼(Nexus Mutual) 거버넌스 투표를 왜 믿느냐. 차라리 분산 투자나 자체 리스크 버퍼로 셀프 인슈어(self-insure) 하겠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보험 보급률을 높이려면 교육과 더불어, 분명한 성공 사례가 필요하다. 예컨대 A 거래소는 해킹 사고가 났지만 가입 고객 전원이 짧은 시간 안에 전액 보상 받은 반면, 보험이 없던 B 거래소 고객은 사실상 전손 처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보험의 가치를 체감하는 속도는 지금보다 훨씬 빨라질 것이다. 현실에서는 손실을 한 번 겪고 난 뒤에야 보험 필요성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테라 사태 이후 다른 프로토콜 포지션에 보험을 들기 시작한 투자자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더해, 커버 프로토콜(Cover Protocol) 파산, 인슈어에이스(InsurAce)의 짧은 청구 기간을 둘러싼 논란 등 몇몇 사건은 디파이 보험 전반에 대한 회의론을 키웠다. 이런 회의와 의구심을 누그러뜨리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투명성은 신뢰 회복의 핵심 수단이다. 넥서스가 대시보드에서 누적 청구·지급 내역을 공개하듯, 실제로 어떤 사고에 얼마나 지급했는지를 온체인·온사이트로 보여주는 노력은 신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크립토 보험 산업의 외부 변수도 무시할 수 없다. 첫째는 규제 불확실성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미국 등 주요국 규제가 모호한 상태가 지속될 경우, 일부 보험사와 재보험사는 아예 이 시장을 외면하거나, ‘규제 리스크 프리미엄’을 얹은 높은 요율을 요구할 수 있다. 둘째는 거시경제 환경이다. 장기 약세장에서는 디파이 풀과 보험 준비금의 달러 표시 가치가 줄어들고 보험료 수입도 감소한다. 이는 보험사의 자본 건전성을 압박하는 요인이다. 반대로 강세장에서 자산 가치가 급등하면, 약관상 보장 한도(cap) 조정이 제때 이뤄지지 않을 경우, 노출액(exposure)이 자본 대비 과도하게 커질 수 있다. 셋째는 기술 변화 리스크다. 이더리움 ‘머지’와 같은 합의 구조 전환, 레이어2의 대규모 확산은 위협 지형(threat landscape)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고, 보험사는 이에 발맞춰 리스크 모델을 재설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수년 내 양자컴퓨팅이 현행 암호 기술에 실질적 위협이 되기 시작한다면, 보험 약관에 ‘양자 행위(Acts of Quantum)’ 리스크를 명시적 면책으로 넣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요약하면, 크립토 보험은 분명 탄력을 받고 있지만,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전통 금융과의 제휴 등을 통해 자본을 보다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오라클 데이터와 온체인 프로세스의 보안·신뢰성을 확보하며, 공정하고 효율적인 클레임 거버넌스를 정착시키고, 더 넓은 재보험·자본 시장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 업계 플레이어들은 이미 이 과제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파라메트릭(지표 기반) 커버, 넥서스와 전통 브로커 간 브리징, AI 기반 리스크 분석 등 많은 혁신이 바로 이러한 문제 해결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방향성, 즉 크립토 보험의 미래와 이 과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해소될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미래 전망: 커버리지 갭을 메우기
향후 몇 년간 크립토 보험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까. 지금까지의 급속한 변화를 감안하면, 현재 전체 크립토 자산의 98~99%가 무보험 상태라는 엄청난 ‘보험 공백(coverage gap)’을 메우기 위한 성장과 혁신이 상당 속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파라메트릭·자동화형 커버리지의 부상, AI 기반 리스크 모델링, 레이어2 및 크로스체인 생태계와의 심화된 통합, 기관투자가의 본격 진입, 전통 보험 자본과 디파이 네이티브 자본의 혼합 구조가 산업의 진로를 좌우하는 핵심 축이 될 전망이다.
파라메트릭 및 자동화 커버리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 파라메트릭 보험은 개별 손해액 산정·손해사정 절차 대신 사전에 정의한 지표(인덱스 또는 이벤트)가 충족되면 자동으로 보상이 이뤄지는 구조다. 온체인 데이터가 풍부하고, 지표 정의가 비교적 명확한 크립토 시장에는 이 모델이 특히 잘 맞는다. 스테이블코인 디페깅(depeg) 커버처럼, 일정 기간 동안 가격이 특정 임계값 아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보상하는 상품은 사실상 파라메트릭 구조가 이미 실전 배치된 사례다.
앞으로는 여기에 더해 다양한 형태의 파라메트릭 상품이 등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 거래소의 시스템 다운타임이 일정 시간(X시간)을 초과하면 자동 지급되는 ‘시장 인프라 가동 중단’ 커버,
- 특정 코인의 가격이 짧은 시간 내에 정해진 비율 이상 급락(플래시 크래시)할 경우 발동하는 변동성 커버,
- 디파이 프로토콜의 예치자금(TVL)이 하루 만에 Y% 이상 감소하면, 해킹·뱅크런 가능성을 인덱스로 간주해 지급하는 ‘프로토콜 퍼포먼스’ 커버 등이 가능하다.
이러한 파라메트릭 폴리시는 스마트 컨트랙트와 직접 연동해 ‘트러스트리스(trustless)’ 방식으로 실행될 수 있다. 이상적인 그림은, 해킹이나 익스플로잇이 발생하는 즉시 보험금이 온체인에서 자동으로 실행·정산돼 피해자에게 필요한 시점에 유동성을 공급해주는 세계다. 대형 재해 이후 수개월이 지나서야 지급이 완료되는 전통 보험과 달리, 크립토 보험은 기술적으로는 거의 실시간 지급이 가능하다. UST 디페깅 당시 리스크 하버(Risk Harbor)가 보여준 사례가 대표적이다. UST 가격이 미리 설정된 트리거를 밑돌자, 별도의 분쟁이나 심사 없이 클레임이 즉시 상환 가능해졌다. 일부 가입자는 빠르게 유동성을 확보해 재투자나 담보 보전을 할 수 있었지만, 수동·오프체인 절차에 의존한 투자자들은 훨씬 큰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했다.
물론 파라메트릭 구조는 앞서 언급한 오라클 리스크에 취약하다. 그러나 다수의 독립 데이터 소스를 사용하는 탈중앙 오라클 네트워크, 암호학적 증명을 활용한 데이터 피딩 구조 등 인프라가 고도화되면서 이 문제는 점진적으로 완화될 전망이다. 더 나아가 파라메트릭 크립토 보험은 온체인 지표를 넘어, 크립토에 영향을 주는 오프체인 이벤트까지 포괄하기 시작할 수 있다. 예컨대:
- 특정 국가가 갑작스럽게 크립토 거래를 전면 금지할 경우 발동하는 정책 리스크 커버
- 대규모 인터넷·전력 장애로 채굴·검증 인프라가 마비될 때 작동하는 인프라 리스크 커버 등은, 실제 세계 이벤트를 신뢰성 있게 전달하는 오라클(날씨, 규제 공지 등)의 발전을 전제로 충분히 상상 가능한 구조다.
제너 & 블록(Jenner & Block)이 소개한 사례처럼, 아르볼(Arbol)이 스마트 컨트랙트를 활용해 NFT 형태로 날씨 보험을 발행하는 시도는 파라메트릭 구조와 온체인 보험이 실물 세계와 어떻게 접점을 넓혀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향후 농작물 수확량, 탄소 크레딧 등 실물 기반 자산이 점점 토큰화될수록, 이들과 연계된 파라메트릭 온체인 보험도 자연스럽게 인슈어테크(InsurTech)의 한 축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크립토 내부 관점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더 많은 프로토콜과 사건 유형을 더 적은 수동 절차로 커버하는 것이다.
컴포저블(조합 가능한) 보험과 리스크 토큰화
또 하나의 진화 방향은 ‘컴포저블 보험’이다. 보험 자체가 토큰화되어 2차 시장에서 거래되거나, 다른 디파이 프로토콜의 담보·유동성 자산으로 활용되는 구조다. 예컨대 특정 프로토콜 해킹 리스크에 대한 커버리지를 나타내는 토큰을 보유하고 있다면, 해당 프로토콜에서 포지션을 정리한 뒤 그 커버리지를 담보로 삼거나, 별도의 마켓플레이스에서 매도할 수 있다. 이는 보험에 유동성을 부여하고, 시장 기반의 가격 발견을 가능하게 한다.
이미 언슬래시드(Unslashed)의 커버 토큰, 넥서스의 NXM 토큰 완전 담보화 이후 토큰화 논의 등 초기 시도가 등장한 바 있다. 이 방향성이 본격 구현된다면, 보험 리스크 자체를 자산처럼 사고파는 탈중앙 재보험·리스크 마켓이 형성될 수 있다. 전통 금융에서 보험연계증권(ILS)이 자산군으로 자리잡았듯, 온체인에서는 ‘리스크 토큰’이 새로운 수익·분산 투자 수단이 되는 셈이다.
AI와 고도화된 리스크 모델링
보험업은 본질적으로 데이터 산업이며, 전통적으로는 오랜 기간 축적된 통계·계량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계리학에 의존해 왔다. 크립토 보험은 장기 히스토리는 짧지만, 반대로 온체인에 세밀한 트랜잭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공개된다는 강점이 있다. 이는 인공지능(AI)과 머신러닝이 진가를 발휘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활용 축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
스마트 컨트랙트 분석
코드 분석에 특화된 AI 모델은 인간 감사인이 수행하던 작업을 보조·보완하면서, 대규모 프로토콜을 빠르게 스크리닝할 수 있다. 과거 익스플로잇 사례와 솔리디티(Solidity) 코드 패턴을 학습한 모델이, 특정 컨트랙트의 복잡도, 외부 호출 패턴, 재진입(reentrancy) 취약 가능성 등을 점수화해 제시하면, 보험사는 이 리스크 스코어를 기준으로 인수 여부·보험료 수준을 보다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다. -
이상 징후 탐지
AI는 온체인 데이터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며, 평소와 다른 거래 패턴—다수 주소에서의 급격한 자금 유출, 특정 프로토콜 내 비정상적인 유동성 이동 등—을 포착해 잠재 해킹을 조기에 탐지할 수 있다. 이는 공격 진행 중에 보험 커버리지를 일시 중단하는 등의 조치(공정성 논란이 뒤따를 수 있다)를 검토하는 데 활용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향후 리스크 모델 개선을 위한 학습 데이터로 쓰일 수 있다. -
가격 책정 및 포트폴리오 최적화
크립토 특유의 높은 변동성과 상관 리스크를 반영하려면, 전통 계리 모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AI 기반 시뮬레이션은 이더리움 프로토콜 버그와 동시 다발적인 시장 급락이 겹치는 복합 시나리오 등, 과거에 전례가 없는 ‘테일 리스크’를 모형화하는 데 유리하다. 이를 통해 보험사는 지나치게 보수적이지 않으면서도, 자본을 잠식하지 않는 적정 보험료를 산정하고, 포트폴리오 내 프로토콜·체인·리스크 유형별 익스포저를 최적화할 수 있다. -
사기·부정 청구 탐지
개인 지갑 도난, 피싱 피해 등 리테일 영역으로 커버리지가 확대되면, 허위·조작 청구에 대한 방어가 중요해진다. 온체인 포렌식과 패턴 인식을 결합한 AI는 특정 ‘해킹’이 실제 외부 공격인지, 소유자 또는 내부자에 의한 계획적 조작인지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미 코인커버(Coincover) 등은 자체 리스크 엔진을 활용해 출금 트랜잭션의 정당성을 평가하고 있으며, 범죄자들이 보험 제도 악용을 노리고 점점 정교한 수법을 쓰게 될수록 AI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
맞춤형(퍼스널라이즈드) 보험료 산정
디파이 사용자별 온체인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별 이용자 또는 개별 기관의 리스크 프로파일에 맞춘 개인화 보험료가 가능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시 콜드월렛을 사용하는 장기 보유자와, 레버리지·고위험 파생상품에 빈번히 참여하는 단기 트레이더에게 동일한 요율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AI는 이러한 행태 데이터를 집계·분석해 각 고객·프로토콜별로 세분화된 요율 체계를 설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크립토 보험의 다음 단계는 결국 커버리지 갭 축소라는 목표로 수렴한다. 전통 재보험과 온체인 풀을 결합한 자본 구조, 파라메트릭·자동화 커버리지의 확대, AI 기반 정교한 리스크 분석, 토큰화된 리스크의 2차 시장 형성 등이 맞물리면, 지금의 틈새 시장은 보다 넓은 디지털 자산 생태계를 포괄하는 본격적인 보험 인프라로 진화할 수 있다. 다만 규제·기술·시장 신뢰라는 세 축의 불확실성이 사라지지는 않는 만큼, 크립토 보험 산업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실험과 조정’을 반복하며 성숙기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커버리지 측면에서 보면, 지금은 특정 프로토콜에 대한 보험에 가입할 때 대부분 이용자가 비슷한 요율을 적용받는다. 하지만 앞으로는 지갑을 연결하고, AI가 개인별 리스크 수준을 평가해(예: 키 관리 방식, 고위험 스마트컨트랙트와의 상호작용 여부 등 온체인 행동 패턴) 보험료를 차등 적용하는 모델이 등장할 수 있다. 이는 안전 운전자에게 할인율을 제공하는 차량보험 ‘테lematics(주행 데이터 기반 요율)’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하드웨어 월렛과 멀티시그를 사용하고, 감사가 잘된 프로토콜에만 접근하는 이용자는, 검증되지 않은 컨트랙트에 무분별하게 ‘에이핑(aping)’하는 이용자보다 지갑 보험료를 적게 내는 식이다. 물론 프라이버시 이슈가 뒤따르겠지만, 자발적 선택을 전제로 한다면 더 안전한 행동을 유도하는 강력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다.
레이어2·멀티체인 확산과 보험
블록체인 사용이 멀티체인·스케일링 솔루션으로 분산되면서, 보험 역시 이를 따라가는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이미 넥서스 뮤추얼(Nexus Mutual)은 코인베이스의 레이어2인 베이스(Base)를 대상으로, 여러 베이스 기반 프로토콜을 한 번에 커버하는 단일 상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런 ‘원(One)-투-매니(Many)’ 형태의 통합 커버리지는 앞으로 더욱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에는 투자자가 이더리움, 아비트럼, 폴리곤 등 다양한 네트워크 전반에서 보유한 포지션을 특정 위험 범주에 대해 한 번에 담보하는 ‘디파이 올 리스크 커버(DeFi All Risk Cover)’를 구매하는 그림도 예상된다. 이를 효율적으로 구현하려면, 보험 프로토콜이 해당 네트워크에 직접 배포돼 있어야 한다. 이더리움 L1의 높은 가스비는 그간 진입 장벽이었지만, L2로의 이전은 비용을 낮출 뿐 아니라 커버 조건 갱신, 프리미엄 스트리밍 납입 등 빈번한 동적 상호작용도 가능하게 만든다. 인슈어에이스(InsurAce) 같은 플랫폼이 더 많은 체인에 진출하고, 신규 보험 프로젝트가 아예 L2나 사이드체인에 네이티브로 등장해, 각 생태계를 밀착 지원하는 모델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브리지 리스크도 핵심 축이다. 로닌(Ronin), 폴리 네트워크(Poly Network), 웜홀(Wormhole) 해킹 사례에서 보듯, 크로스체인 브리지는 수억 달러 손실을 초래한 구조적 취약 지점으로 악명이 높다. 브리지 리스크를 커버하는 보험 수요는 이미 존재하며, 앞으로는 프로토콜이나 브리지 운영사 자체가 보험에 가입하거나, 상호 공제 풀을 조성하는 형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예컨대 대형 브리지들이 공동 기금을 적립해 해킹 시 이용자 피해를 보상하는 ‘브리지 뮤추얼(Bridge Mutual)’ 같은 구조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는 보험사나 DAO가 중개하는 방식이 될 수 있고, 향후 브리지가 이용자를 유치하기 위해 사실상의 ‘표준 장치’로 요구될 가능성도 있다. “해킹이 나도 일정 한도까지는 자동 보상된다”는 확신은 브리지 신뢰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레이어2 채택이 확대되고, 더 많은 리테일 이용자가 저렴한 L2 네트워크를 통해 온보딩되면, 지갑이나 프로토콜 단에 보험 기능이 기본 탑재되는 ‘기대값’이 형성될 여지도 크다. 예를 들어 L2 지갑 안에 “자산 보호 활성화 – 연 0.1% 비용” 같은 토글이 있고, 이를 켜면 백엔드에서 제3자 보험사로부터 자동으로 커버리지를 구매하는 구조다. 이른바 임베디드 인슈어런스(embedded insurance)로, 이용자 경험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보험 모델이다. 이는 대중 확산의 핵심 동인이 될 수 있다. 전통 금융에서 FDIC처럼 ‘당연한 안전장치’를 기대하는 일반 투자자 입장에선, 지갑이나 플랫폼이 기본적으로 보험을 제안하고, 원치 않으면 옵트아웃하는 구조가 훨씬 수용성이 높다.
기관 진입과 시장 팽창
크립토 보험의 미래는 기관투자가의 디지털 자산 채택 속도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은행·자산운용사·기업이 본격적으로 크립토를 다루기 시작하면, 글로벌 메이저 보험사들 역시 본격적으로 발을 들일 수밖에 없다. 이미 대형 브로커인 에이온(Aon)과 마쉬(Marsh)가 크립토 특화 보험 솔루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알리안츠(Allianz), AIG 등 대형 보험사들도 관련 리스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2025년 업계 설문조사에 따르면, EU의 미카(MiCA)처럼 규제 명확성이 높아질수록 보험사들은 크립토 비즈니스를 인수할 의지가 커진다고 답했다. 규제가 정비되면, 의도치 않게 무허가 불법업체를 보험으로 뒷받침하게 될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특히 기관 커스터디 분야가 핵심이다. BNY 멜론,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 같은 전통 수탁사가 크립토 커스터디를 시작하면서, 기관 고객은 은행 수준의 보험 커버를 당연시한다. 이들은 자회사형 캡티브를 통해 자체적으로 리스크를 흡수하거나, 시장에서 대규모 보험 커버리지를 요구할 것이다. 평판이 확립된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한 커버 수요는 신규 보험사의 유입과 전체 수용능력(capacity) 확대로 직결된다. 더 나아가, 연기금이나 ETF 등이 크립토를 편입할 경우, 기초 자산에 대한 보험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예컨대 미국에서 현물 비트코인 ETF가 승인된다면, ETF의 비트코인 커스터디에 대해 상당 규모의 보험이 설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숨에 수억 달러 단위의 수요를 발생시키며, 보험사들로 하여금 크립토 관련 어그리게이트 한도를 키우도록 유도할 수 있다.
트래디셔널·디파이 보험의 하이브리드 모델
장기적으로는 전통 보험과 디파이 보험 간 경계가 흐려지며, 상호를 ‘리스크/판매 채널’로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모델이 부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형 보험사가 넥서스 뮤추얼의 특정 신디케이트에 재보험(Reinsurance)을 제공해 뒷단에서 리스크를 떠안거나, 반대로 디파이 보험사가 자신의 리스크 포트폴리오 일부를 로이즈 오브 런던(Lloyd’s) 시장에 재보험으로 넘기는 시나리오다.
인슈어에이스 CMO는 앞으로의 핵심 트렌드 중 하나로 “전통 보험과 블록체인 기반 커버리지를 연결하는 브리지가 등장해, 더 높은 수용능력과 유연성을 제공하고, 디파이에는 자본을, 전통 보험에는 효율성을 제공하는 방향”을 꼽는다. 사용자는 디파이 인터페이스에서 자연스럽게 보험에 가입하지만, 그 뒤에는 리스크의 일정 비율이 전통 보험사의 대차대조표로 이전되는 구조를 떠올릴 수 있다. 스마트컨트랙트가 재보험사와의 정산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식이다. 이런 시너지는 현재의 여러 구조적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디파이는 더 많은 자본과 신뢰를 확보하고, 전통 보험은 관리비용을 줄이는 기술과 새로운 고객층을 얻는다.
규제·정부의 역할
크립토가 금융 시스템의 핵심 축으로 편입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안전망 제공자 또는 의무화 주체로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민간 시장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스템 리스크에 대해, 테러 보험처럼 정부가 재보험을 제공하는 모델이 대표적이다. 또 중앙은행이 CBDC(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를 도입할 경우, 해당 CBDC를 취급하는 지갑에 일정 수준의 보험 또는 공적 보증을 의무화하는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이와 유사하게, 거래소 파산을 대비한 업계 공적 기금(공·사 혼합 구조)도 구상 가능하다. 예를 들어 FDIC 예금보험기금처럼, 거래소들이 수수료 일부를 출연해 조성한 반(半)의무형 기금이 대형 거래소 파산 시 고객 자산을 일정 한도 내에서 보호하는 방식이다. 지금으로선 가정에 가깝지만, 또 하나의 ‘대형 거래소 붕괴’가 발생할 경우, 규제당국에 이런 제도를 요구하는 정치·사회적 압력이 상당할 수 있다.
기술 변화에 따른 새로운 리스크도 부상하게 된다. 양자컴퓨팅이 암호키를 위협하는 시나리오가 대표적이다. 보험은 해당 리스크를 면책으로 돌리거나, 별도의 ‘포스트퀀텀 리스크’ 특약 상품을 만들어, 향후 양자 공격으로 비트코인이 탈취될 경우를 대비한 커버리지를 설계할 수 있다. 이미 이더리움의 PoS 전환 이후 ‘슬래싱 리스크’처럼 과거 비트코인 시절엔 없던 새로운 위험 카테고리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전용 보험 상품도 속속 출시되고 있다. 커버 범위 정의는 기술 진화 속도에 맞춰 지속적으로 재설계될 수밖에 없다.
‘크립토’ 꼬리표가 사라지는 날을 향해
전반적으로 크립토 보험의 미래는 더 깊이 통합되고, 더 자동화되며, 더 큰 수용능력을 갖춘 방향으로 수렴할 가능성이 크다. 시간이 흐르면 ‘크립토 보험’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보다는, “크립토가 내재된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보험”으로 인식이 전환될 수 있다. 성숙한 금융 인프라의 표지는, 이용자들이 별도의 의식 없이도 “어느 정도 보호 장치가 깔려 있다”고 당연하게 전제하는 지점이다.
향후 대형 거래소 이용 화면에서 “자산은 언더라이터 A의 보험으로 최대 X달러까지 보호됩니다”라는 배지를, 은행 창구의 “FDIC 예금자 보호” 표지와 비슷한 감각으로 보게 될 수도 있다. 디파이 대출 풀 UI에 “넥서스 뮤추얼 커버 적용 – 약관 보기” 같은 문구가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이용자들이 이를 수익률·리스크 판단에 하나의 요소로 반영하는 모습도 충분히 예상된다.
맺음말
크립토 보험은 한때 실험적인 아이디어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크립토·디파이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장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무언가 잘못됐을 때,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도난·해킹·각종 사고에 대한 재정적 보호막을 제공함으로써, 극단적 변동성과 구조적 리스크로 유명한 영역에 신뢰의 한 층을 더 얹어주는 역할을 한다.
초기에는 커스터디 리스크 등 기초적인 영역에 한정된 협소한 커버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탈중앙 상호공제와 온체인 리스크 풀까지 등장해 런던 로이즈 신디케이트와 경쟁·보완 관계를 형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핫월렛 해킹, 콜드월렛 분실, NFT 도난·가치하락, 디파이 프로토콜 취약점·경제 설계 실패 등, 크립토 생태계 어느 영역도 리스크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바로 이 지점들이 보험의 타깃이다.
스케일과 완전성 측면에서 여전히 과제가 남아 있지만, 시장의 궤적은 분명히 우상향이다. 업계 한 임원의 표현처럼, “디파이 플랫폼의 인기와 새로운 리스크 관리 기법의 등장에 힘입어, 디지털 자산을 보호하려는 투자자의 수요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결국 관건은 탈중앙 혁신과 전통 보험의 축적된 위험관리 노하우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결합하느냐다. 이 결합이 성공한다면, 크립토 시장 참여자 모두를 위한 더 큰 수용능력과 다층적 커버리지 옵션이 열릴 것이다.
궁극적으로 보험은 크립토를 ‘와일드 웨스트’에서 지속 가능하고 신뢰 가능한 글로벌 금융의 한 축으로 전환시키는 촉매다. 언젠가 불가피하게 찾아올 ‘나쁜 날’을 맞았을 때, 그 추락을 완화해 줄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장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가장 분명한 지표가 될 것이다.혁신적인 보험 상품들이 이 같은 리스크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우리는 중개사·신디케이트를 통한 전통 보험사(예: Coincover와 함께 핫월렛 보험을 인수하는 로이즈(Lloyd’s))부터, 전통 언더라이팅과 크립토 기술을 잇는 Evertas, Chainproof 같은 크립토 특화 보험사까지, 중앙집중형 제공자의 역할을 짚어봤다. 동시에 Nexus Mutual, InsurAce, Risk Harbor 등 탈중앙 보험 모델을 살펴보며 담보 구조, 보장 범위, 청구·심사, 자본 조달 방식 등을 비교했다.
각 모델은 저마다 강점을 갖고 있다. 탈중앙 플랫폼은 온체인 리스크 보장과 커뮤니티 주도의 보험 설계에 강점을 보이는 반면, 중앙집중형 플레이어는 대규모 자본력과 엄격한 규제 준수 역량을 제공한다. 최근에는 두 영역이 충돌하기보다는 협업을 택하며, 각자의 장점을 결합해 보장 범위를 넓히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규제 환경 역시 크립토 보험을 수용·장려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홍콩과 두바이와 같은 관할권은 거래소 인가 요건에 고객 자산 보험 가입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전 세계 규제 당국도 고객의 암호자산이 실제로 보험에 가입돼 있는지에 대한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규제 틀은 소비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보험 상품 자체에 공신력을 부여해 신규 플레이어의 시장 진입을 촉진하는 효과도 낳는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명시적 의무화 사례는 아직 제한적이지만, 리스크 관리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는 흐름 속에서 보험 또는 준(準)보험 성격의 재무적 안전장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지는 추세다.
물론 크립토 보험이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현재 대부분 상호공제 성격의 풀은 과도하게 담보를 쌓으면서도 잠재 수요에 비해 규모가 작아 자본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오라클 조작 리스크, 탈중앙 거버넌스를 통한 클레임 심사의 난제 등 기술적·운영상의 허들도 존재한다. 전통 재보험 시장과의 연결 역시 아직 진행 중인 과제다. 그럼에도 Munich Re, Arch 등 글로벌 재보험사가 시험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점은, 이러한 난제가 하나씩 해결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한다.
앞을 내다보면, 크립토 보험의 미래는 역동적이면서도 상당히 낙관적이다. 스마트컨트랙트를 통해 특정 조건 충족 시 거의 즉시 보상이 이뤄지는 자동화·파라메트릭(지표 연동형) 상품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을 접목한 리스크 평가·가격 책정·위협 탐지가 정교화되고, 보험이 개별 크립토 서비스에 자연스럽게 내장돼 사용자는 별도의 절차 없이 보호를 받는 사용자 경험이 자리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 기관·개인 투자자 모두가 전통 금융과 동등한 수준의 보호를 크립토에서도 요구하게 되면서, 크립토 보험 시장은 본격적인 외형 성장을 앞두고 있다. 레이어2 확장, 크로스체인 활동 증가 등 트렌드는 새로운 리스크 지형을 만들면서, 여러 체인과 플랫폼에 분산된 자산을 한 번에 커버하는 ‘통합형’ 보험 상품의 등장을 촉진할 것이다. 여기에 대형 전통 보험사의 보다 공격적인 진입과 우호적 규제가 더해지면, 시장 수용능력과 안정성이 커져 대규모 손실도 시스템 전체가 흡수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될 전망이다.
결론적으로, 크립토 보험은 니치 아이디어에서 벗어나 크립토 산업의 신뢰와 복원력을 떠받치는 본격적인 리스크 관리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 “키를 갖고 있지 않으면 코인도 없다(not your keys, not your coins)”는 오래된 격언은 이제 “당신이 직접 키를 보유하든, 제3자가 보관하든 그 리스크를 온전히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로 확장되고 있다.
견실한 상품 설계, 건전한 거버넌스, 혁신적 블록체인 프로젝트와 전통 보험업의 협력이 어우러진다면 크립토 보험은 계속 성숙할 것이다. 이는 지갑, NFT, 디파이 포지션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현실적 해법을 제공해, 참여자들이 새로운 금융 프런티어에 보다 큰 심리적 안전감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게 만든다. 크립토가 점차 본류 금융과 맞물려가는 과정에서, 탄탄한 보험 레이어는 불가피한 돌발사고 발생 시 손실을 완충하고 신뢰 회복 속도를 높여, 크립토 생태계 전반의 안정성과 신뢰를 한층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